2015년 10월 13일 화요일

Suffragette (2015)

https://youtu.be/SUKjwIaTZ4Y
https://youtu.be/-JYzgPPoQf0
Meryl Streep Interview on Suffragette

"Deeds, not words"

영화의 여운보다도 메릴 스트립의 인터뷰가 심장을 때렸다.

세상은 결국 다양한 문법과 언어의 교합물 이다.
그런데 그 언어는 때로는 수 많은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기도 하고, 태어난 순간부터 이유없는 폭력 아래로 내몰기도 한다.

태어났을 때부터 원래 그래왔다고 여겨지던 이 세상의 구조는 사실은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것이고 그리고 그것을 변화시킬 힘은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다.

이 영화는 그런 의미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가 누리고 있는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사실은 투쟁과 싸움의 결과였음을 말해주었고, 그것이 고작 100년도 되지 않은 역사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내가 집착했던 것이 행동이 아니라 언어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데올로기적인 신화를 수반하는 몇몇 단어들에 대한 일차원적인 거부감이
당연한 현상과 행동을 직면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메릴 스트립이 말하듯 - 무언가 틀린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
그것이 변화의 시작이라고 본다.

그러나 변화는 용기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하나의 행동의 시작은 또 다른 행동을 포기를 궁극적으로 수반한다. 포기해야하는 것들과 얻어야 하는 것들의 가치와 사회가 구성해 놓은 책임을 디디고 서서 안개 낀 길을 선택할 수 있을까.

지난 번 Martian을 보면서도 든 생각이었고, 이 영화에서의 에밀리의 죽음을 통해서도 느끼는 바이지만, 지금의 나에게 세월호 사건과 '절망적이고 희망이 없는' 일련의 사건들은 깊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단 한명의 생존에 세상이 움직이는 서사구조를 보면서 300여명의 학생들과 사람들을 바다 한 가운데에 두고 올 수 밖에 없었던 우리나라와, 그들에 대한 따뜻한 연민은 무관심과 짜증으로 바뀌었고, 생명을 저버리면서 까지 세상의 부조리함에 대항하려 했던 사람들의 '행동'들은 세상의 팍팍함과 이기주의 아래에서 묵살당했다. 지금의 우리나라 사회는 더 이상 행동이 세상을 바꾸지 못할 것이라는 패배주의에 휘감겨있고, 눈에 보이는 부조리는 보이지 않는 척으로 일관하는 것이 당장의 삶에 더 이로울 것이라는 판단에 이르게 한다. 극단이 아니라면 관심없음이 평범한 사람들의 가치가 되고, 평범한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용기 없는 사람들의 쉽지 않은 미덕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세상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여성에 대해 생각한다.
현실적인 어려움이라고 말하는 '말'은 문제에 대한 변화의지가 없다는 말과도 같다.
하지만 무엇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할 필요나 가치는 못 느끼고, 아니 필요나 가치는 실감하지만 내가 나서서할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
나는 지금 어디에 서있는가.

나는 여성 감독이 촬영한 이 영화를 정말로 오래간만에 보면서
미디어가 얼마나 남성중심적인 시선을 (멀비가 말한 그대로!) 관객들에게 강요했는지 깨달았다. 관객에 따라서 이 영화가 다른 영화와 얼마나 다른 시선을 (카메라의 움직임이나 프레임으로) 가지고 있는지 실감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이 영화는 정말로 여성의 영화였다 - 예를 들면 남성과 여성을 촬영하고 있는 level과 앵글의 차이, 일하는 여성이 느끼는 갈등과 감정선의 지점을 표면에 드러내고 그것이 영화를 이루고 있는 주요한 담론으로서 작용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역시나 당연한 것이다.
폭력은 정당하지 않다.
당연한 죽음은 없다.
그렇다면 명예로운 죽음은 있는가?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가치판단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미디어를 비롯하여 대중매체가 사람들의 가치를 보편화 시키고,
많은 사람들이 같은 것을 원하도록 만들면서
경쟁은 더욱 치열해진다. 소수가 누리고 있는 것들은 재분배되지 않는다.

* 글을 어떻게 쓰는가. 말을 어떻게 해야하는가.
나는 최근 몇 가지 중요한 인상과 키워드를 적당하게 버무리는 것으로 '말'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것의 한계를 매일 매일 어설픈 언어 속에서 실감하면서,
이제는 연결되지 않는 모호한 지점을 파고들어서 그것을 아주 명확하고 엄밀하고 깨끗하게 만들어 '말이 되는 말'을 하는 것을 언어 사용의 최대의 목표로 하고 있다.
다른 말로 한다면 나는 이제 알맹이가 있는 언어를 사용할 것이라는 말이 된다.
올해 초 나는 비전과 콘텐츠를 찾았고
여름의 나는 문법을 찾았고
지금의 나는 말을 찾고 싶다.
간극을 채우는 것은 궁극적으로 학문이 된다.
안개꽃으로 공간을 채우지 않겠다.
그것이 내가 삶을 대하는 기존의 태도였다면
나는 차라리 그것을 더 명확한 것들의 나열을 통해 비어야 할 공간을 비워두겠다.

** Vote for Women ;
나는 현실의 문제를 눈감고 있는가
반문하라




2015년 10월 11일 일요일

Right Now Wrong Then

2015 BFI London Film Festival,

Right Now, Wrong Then (2015, Hong Sang-Soo)

Cine Lumiere Screening (11/10/2015)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한번에 이 영화의 제목을 맞게 말할 수 있을까.
홍상수 감독의 그 신작 보았어요? 하면서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혹은 지금은 틀리고 그때는 맞다? 하며 버벅거리는 '시네필'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 감독은 이상한 실소를 뿜었을 것 같다. 참 이상한 사람이다. 그의 카메라에 담긴 것들은 혹은 그가 카메라에 담은 것들은 대부분 위선적이다. 감정을 살려내려는 줌인이 없어도, 캐릭터에 대한 묘사가 없어도, 늘 반복적인 '홍상수'의 플롯 안에서 그는 계속 새로운 것들은 위선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한다.

영화는 크게 두 가지 챕터로 나뉘어져 있다.
그 첫번째와 두번째는 미묘한 지점에서 다르지만 전혀 다른 뉘앙스를 주는데,
그것이 엄밀하게 무엇인지는 사실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내가 읽기에는 첫번째와 두번째가 (물론 완전히 다른 촬영이었겠지만) 같은 평행적 상황에 대한 다른 표현이라고 읽었고 - 그러니까 다른 이야기는 아니라고 판단했고,
대사의 길이나 속도의 차이역시 보는 사람의 심리에 따라서 약간의 오차가 있을 수 있다는 판단하에 나는 그 둘의 '거의 비슷함으로 같다' 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분명하게 다른 것들은, 첫번째 파트는 매우 홍상수다웠다는 것이고 두 번째 파트는 또 다른 홍상수 다웠다는 점이다. 말로 정리하기 매우힘들지만, 1부에서의 남자 캐릭터가 더 익숙했다면 왜일까.

힘들게 상징과 색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고,
외국 관객들과 한국인 관객들이 다른 포인트에서 웃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아마도 홍상수의 영화가 좋은 이유는 역시나 그것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웃음 포인트와 분명 어른들의 인생의 어떠한 낮과 밤을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계속 그의 영화는 기대되고 기대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