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이 끝났다
발로 썼는지 손으로 썼는지는 모르겠고 정신없는 세시간이었는데 그다지 내용이 알차지는 않았다. 저녁약속이 있기는 하지만 사실 피곤해도 오늘만큼은 집에 일찍들어가기 싫은마음에 잡은 약속이다. 그리고 시간이 남아서 내셔널 갤러리에 왔다. 갤러리는 역시나 생각을 정리하기는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피곤할때나 우울할때나 멍하니 생각을 그림과 그림사이에 핑퐁 시키며 적당하게 생각의 흐름에 빠져들 수 있다. 비록 하루의 벼락치기였지만 그래도 어제 공부한 것을 배경으로 그림을 마주하게 되었다. 분명 여러번 온 곳인데 올 때마다 새롭다. 여러번 오긴 했어도 자주 온 곳은 아니라 그럴까. 아니 제대로 공부해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아니면 평소처럼 기억력이 안좋이서? 이유야 뭐든간에 난 이 갤러리에 대해 아는건 별로 없다.
어제 외웠고 오늘 쓴 내용인데 벤야민의 아우라 개념이다. 기술복제시대에 예술에서 이 아우라는 사라졌다. 아우라란 원체 복제되지 않은 원래의/진정한 예술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을 말하는데 영화나 사진의 경우에는 복제되어 대중에게서 소비되는 것으로 그 이전의 예술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를 취하기 때문에 이 아우라라는 유일무이한 개념이 의미를 잃게된다. 그런데 나는 내셔널갤러리에서 어떤 그림이 아우라를 가지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일단 첫번째는, 음 조금 다른 얘기지만 영화이론에 대해 이야기할때 이론가들은 상대적으로 다른 예술의 영역을 상당히 단순화시켜버린다. 나는 영화를 공부함으로서 그러한 인식체계에 익숙해졌고 다른 예술과 차별되는 차원 온전한 영화적인 문법이 구사되는 예술로서의 영화 개념을 이해하게 되었다. 물론 부분적으로 이는 틀린말이 아니다. 클로즈업, 카메라 무브먼트, 편집 과 같은 것은 영상만이 가지는 고유한 성격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나는 막상 내셔널 갤러리에서 이러한 외침이 약간은 겸연쩍다는 생각이 들어버렸다. 테이트모던이라면 모를까. 근대화의 예술. 근대의 문명을 살아있는 역사를 가진 미술작품앞에서 논하는 일이 약간은 부끄러워졌다. 맞다. 영화는 인문학의 총아가 될 자격은 있다. 그런데 분명 멈추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동감있게 살아 움직이는 그림들과 프레임화 되어있음에도 상상할 수 있는 off screen space를 그림에서 만나게 되었다. 약간의 틀어진 입술 하늘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그저 그런 종교화를 얼마나 생동감있게 심지어는 발칙하게 만들어주는지 또 새삼 감탄하게 되었다. 바쟁이 말한 것처럼 과연 사진의 탄생은 예술의 두가지 추구방향 중 하나, 현실을 그대로 보존하고자 했던, 를 충족시켰을까. 말도안되는 소리. 그래서 사진은 놀랍지만, 그림 앞에서 소리낼 수 없다. 나는 아직 내 귀가 따가워지고 눈이 즐거워지는 사진을 만난적이 없다. 멋진 사진들이 있지만, 나는 더 멋진 그림들을 많이 만났다. 이것은 개인적 경험임으로 크게 의미를 가지지는 않는다. 물론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고 재생산하게 된 것 이 주는 의미도 있을테지만...글쎄.
나는 그리고 그림 앞에 서서 생각했다. 이 것이 주는 감동이 아우라인가? 글쎄다. 재미있게도 나는 그것은 인상이나 impression이나 영감 inspiration일 수 있어도 아우라와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내셔널갤러리의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인 이명박 닮은 얀반아이크의 작품. 그것은 이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작품이지만 나는 그것의 아우라를 느낄순 없었다.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아서인가. 상징적인 개념이기 때문일까. 아우라라는 종교적 영적 존재의 근원이 유일성 진정성 원조 라고 해석했으나 나는 그 아우라가 오히려 접근하기 힘들고 멀리 있을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비너스 상을 보거나 반 고흐의 그림을 만난다고 한들 나는 엽서나 사진보다 더 선명한 색감과 생생한 질감에 감탄하고 이래서 실물을 보라고 하는구나 느낄 수 있지만, 많은 경우 그것들은 나의 삶에 의미를 가지지 않기 때문에 아우라라는 것이 잘 다가오지 않는다. 또한 언제든지 접할 수 있다라고 하는 대상의 속성은 아우라를 분명 반감시킨다. 이건 그래서 복제의 개념과도 유사할 것이다. 그런데 또 복제되었다고 하여 고유의 기운은 잃는 것은 아니고, 아무튼간에 생각할 수록 복잡하다.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루벤스의 삼손이 머리카락 잘리는 장면. 색감때문에 멀리서도 한눈에 보이지만 스토리를 들었고 표정 하나하나를 보게 되어 더 기억에 많이 남는다. 인상적이었는데, 그래도 여전히 갤러리를 나가면서 아우라의 실체가 좀 애매해졌다. 루벤스가 그린 저 여인의 실물과 그 밑의 일반 사람이 잘따라그린 그림,그리고 내가 카메라로 단숨에 복제해버린 이미지는 어떻게 많이 다른가? 미래엔 과거의 스튜디오나 지금의 영화현장처럼 많은 도구나 마이크 거대한 카메라 와 같은 것이 점점 필요하지 않게될 것이다. 기술이 발전하는 속도는 너무 빠르고, 그 과정 속 영화 이론이 주목한 장치이론, 영화관 내의 환경과 관객성에 대한 이론 은 벌써 의미가 많이 퇴색되지 않나. 특히 기술과 관련된 이론들은 어려움을 겪는다. 과거 20년대의 세트장을 보면서 거대한 기구들이 존재하지만 이를 삭제하기 위한 framing과 editing이 존재한다고 했다. 맞는 말인데, 그런데 과연 미래에 정말로 눈에 부착되어버린 카메라와 시공간의 제약이 사라진 영상 기록기는 리얼리즘의 측면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나. 현실에 그대로 존재하는 경계없는 연기는 프레임없이 전달될 수 있으며, 영화는 네모난 프레임에서 빠져나오게 되었을 때 완전히 새로운 영역에 들어서게 될것이다. 생각만 해도 설레이지만 머지 않았다고 본다. 스크린 혹은 프레임이라고 하는 경계가 사라지고 연기/내러티브와 현실의 경계가 혼돈되고 그 사실 자체가 주는 또다른 attraction/distraction 이 개념은 또 대입은 된다만, 내가 상상하는 미래 영화는 그렇다.
뭐 변함없이 갤러리에 그림은 그 자리에 있을테고, 살면서 유일하게 아우라를 느꼈던 피라미드도 그 자리에 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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