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ct of Killing , 2013, Joshua Oppenheimer
이런 영화를 봤다.
위의 장면을 캡쳐한 이유는, 영화 내내 떠올랐던 Werner Herzog를 화면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폭포수가 떨어지는 곳에서 피해자들이 가해자인 안와르에게 메달을 건네면서 우리를 죽여 천국에 가게해주어 감사하다고 말하는 장면이 그랬고, 중간중간 의도된 인터뷰 장면들 - 의자를 가운데에 사물을 주변부에 색상과 분위기가 어우러지도록 배치한 장면들 - 이 그랬다.
(The Act of Killing)
(Grizzly Man, Herzog)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장면이라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액트오브킬링의 인터뷰장면을 보면서 계속해서 Herzog의 인터뷰장면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는 이 영화의 핵심이 아니다.
영화의 가장 중요한 것의 근처에 다가가지도 못하는 아주 주변부의 사소한 것을
영화를 공부했다는 이유만으로 보란 듯이 찾아내 보이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의 공부와 발견에 대한 기록을 블로그에 해보고 싶기 때문에
저 한 장면이 나를 블로그에 글을 쓰게한 동기가 된다.
그래서 나에겐 의미가 있다.
일단 영화에 대한 몇가지 생각들
1. '가해자'의 역사. 그리고 '영웅'의 역사
나는 며칠전 수업에서 보게된 장군의 아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는 Gangster지만 '장군의 아들'아닌가, 일본놈과 맞서 싸운다.
장군의 아들 김두환 역시 역사 속에서 사람들을 위해 일본놈과 맞서 싸운다는 이유로
그의 폭력이나 위협이 정당화 되었고, 심지어는 멋진 영웅으로서 캐릭터화 된다.
물론 이 영화의 역사적 사건도 그렇고 인도네시아의 현재 상황의 성격은 매우 다르다.
그들은(폭력배 - 판차실라 청년회, 프레만) 공산당을 대학살한 대가를 치룬 적이 없다. 아직도 권력을 쥐고 있으며 사람들을 위협하지만 정부의 입장에서는 대학살을 - 숙청이라 부르고 일견 정당하고 합당하다고 말한다. 그들이 한 일이 나쁜짓이 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처벌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을 직접 고문하고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을 강간하고 집을 불태우고, 그들의 가혹행위를 당당하게 말하는 것은, 그들이 악몽에 시달리고 술과 마약으로 '살생'의 기억을 잊으려는 노력과 그만큼 더 강한 '종교적 수준'의 이념이라는 이름의 힘이 그들의 일들을 정당하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그들이 했던 일이 얼마나 잔인하고 비인간적이고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들은 공산주의자이기때문에, 숙청하고 사라져야할 대상이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이 당연해진다.
이 영화가 특별해지는 것은 이러한 사건을 피해자의 입장에서 다루지 않고 가해자의 입장에서 다룬다는 점이다. 이 영화의 입장은 분명하게도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누고 있고, 그 말에는 '나쁨'과 '좋음'의 경계를 그려내고 있다는 말이 내포되어있다. 아직까지도 권력을 지닌 가해자와, 가해자가 말하는 가혹행위 - 사실은 이질적인 장면들이 넘치는 이 영화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하는 의문을 지울 수가 없다.
2. Sympathetic
그래서 이 영화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명한 대신에, 주인공 Anwar에 대한 인간적인 sympathy 역시 담아낸다. 사실 동정이라고 말하기는 뭐하고, 비인간적인 일을 일삼은 Anwar를 인간으로 그렸다고는 말할 수 있겠다. 특히나 마지막에 구역질을 하는 모습으로 영화를 마무리한다는 점이 그렇다. 사실은 영화의 전체적인 톤에 깔려있는 이 Sympathy에서 나는 Herzog를 발견했는지는 모르겠다. (다시 말하지만 이는 중요하지 않다..)
가해자들에게 대학살을 재연해보라?
영화는 주로 이러한 문구로서 홍보되었는데,
내가 저 문구를 만나기 전에 영화를 보게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저 문장에서, 난감해하는 가해자의 얼굴이 그려지지만,
영화에서는 웃고 있는, 아이들 앞에서도 대학살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이들을 만나게된다.
물론 난감해하는 장면들도 종종 등장한다. 중국인이었던 아버지가 대학살에서 쥐도새도 모르게 죽고 시체로 돌아온 이의 이야기를 눈앞에서 듣는 것, 그리고 자신이 죽였던 바로 그 방법으로 고문당하고 죽는 장면을 촬영하는 것. 재연만으로도 휘감는 공포. 그 공포가 그들이 했던 일에 대한 대가라고 한다면, 여전히 충분하지 않다.
3. Act of Killing
그러니까, 이렇게 난감하고 난해한 상황을 던져준 것 만으로도 생각할 거리가 불어나지만,
결국엔 The Act of Killing 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비단 비교적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학 '학살'뿐만 아니라
전쟁, 범죄살인 그리고 자살까지도.
자연재해에 의한 죽음이나, 병으로 인한 죽음과는 성격이 다르다.
그런데 사람이나 사회에 의한 죽음들은 사실은 다 비슷하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영화 마지막에 Anwar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들었다. 이 것이 정말로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영화였다면 그렇게라도 끝내야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는 각종 범죄자들이 많지만, 모든 살인행위가 범죄가 아니라는 것이..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도 어떤 순간에 나라의 부름에 따라서 살인행위에 가담할 수 있다는 것이. 혹은 나 역시 그렇게 될 가능성이 늘 존재해왔다는 것. 에대해 생각해본다.
특히나 모두가 군대에 가야하는 현재 전쟁 - 휴전이지만 - 중인 나라라면 더욱 그렇다.
그리고 또 이런생각이 든다.
나의 세대의 가장 큰 공포는 무엇인가.
과거의 할아버지 할머니의 세대는 일제강점기 - 식민지 시대와 한국전쟁을 겪었고, 그리고부모님 세대는 독재정권 밑에서 데모하고 싸웠다. 말하자면 우리 바로 직전 세대까지만 하더라도 늘 이러한 고문과 고통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눈앞에서 겪었던 세대다.
나의 기억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책에서나 배웠으며, 간절하게도 내가 살면서 겪지 않았으면 하는 일이다. 하지만 늘 직감적으로, 우리 세대도 언젠가 전쟁을 겪게 될 것만 같다. 어떠한 방식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그리고 실제로도, 지금 IS의 일련의 일들이나, 프랑스의 테러나, 시리아의 일이나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영화 속 인도네시아도 마찬가지고, 가까운 북한도 그렇다. 중국의 큰 땅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사실 알 수 없다.
그럼 말을 바꿔야 한다. 나의 세대의 공포가 아니라.
나, 에게 공포는 무엇인가.
아직까지는 고문과 살인의 공포를 경험한 적이 없다.
세계 2차대전의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일제식민지시대와 한국전쟁 자료들을 보면서 독재체제 하의 학생들을 보면서 단지 상상하고 마음아파할 뿐이다.
우리 세대의 시위는 비교적 평화로운 촛불시위였으며, 우리 세대의 아픔은 총과 칼보다는 현실의 차가운 벽 때문이 아니었나. IMF이후 겪은 경제위기에서 어제의 동료에게 정리해고당하고, 돈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라는 말 아래서 벌어진 '차가운 사건들'.
작년의 사건 사고는, 사건 사고들 자체도 충격적이었지만, 이어진 더 차가운 시선들, 본질에는 관심 없고 유흥과 놀림거리로 전락해버린 사람 목숨이. 그것이 더 두려웠다.
몇몇 사람들이 놀림감으로 삼아버린 사람의 목숨이. 더 많은 사람들을 꽁꽁 닫히게 했을 것.
말로 물어 뜯고 상처주고 비교하고 경쟁하고 남 위에 서기 위해 노력하는. 그것이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일본이라는, 공산주의라는, 독재정권이라고 하는 그런 벽이 아니라. 내 옆의 사람들이 나의 인생이 벽이 되어버렸나. 아니 그런데 그만큼 차가운 사회는 아닌 것 같다. 적어도 아직은 아닌 것 같다. 따스함이 넘치는 그런 사회를 추구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 아직은 살만 한 곳 아닌가.
그래서 나에게 늘 가장 큰 공포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다. 깜깜한 미래가 가장 두렵다.
그런데 '나'는 또 그런 사람은 아니다. 늘 계획한 미래가 그 나름대로 착착 진행된다.
그래서 나는 예측할 수 없는 미래가 두렵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살아갈만 할 것 같다.
결국 영화보다는 두서없는 생각으로 마무리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