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31일 토요일

[영화] Birdman

This is what i may call inspiration:-)
Full of useless 'review-ish' vocabs are attached to this piece of work - a depressing heroic comedy - and f***ing

If , i had to watch this film to write an essay or proper review; i'd probably pick up things like :
Long - take
Hero
Stardom
Hollywood and Broadway
Family
Camera movement and
Use/establishment of (amazing!) Temporal-Spartial relationships
Reality
Truth or Dare
Satire? Or Black Comedy
Genre and Theme


But afterall, I loved it, depressing- well was it? I was lost in depression, i knew that this film is talking about something super 'depressing' subject however, did the film let you actually feel that way? Perhaps, the 'limited perspective' which camera had lead us was simply much more than - gaze / look - stuff!! Oh yes, it's a Hollywood film , how/ever/what/ever


And now i'm watching Rope1948
A few 'shots' will lead us and overwhelm our minds 
And anyway it will lead us to Laura!
Neverending cinemaaaaaaaa

2015년 1월 25일 일요일

[영화] 액트오브킬링 ACT OF KILLING

The Act of Killing , 2013, Joshua Oppenheimer

이런 영화를 봤다.
위의 장면을 캡쳐한 이유는, 영화 내내 떠올랐던 Werner Herzog를 화면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폭포수가 떨어지는 곳에서 피해자들이 가해자인 안와르에게 메달을 건네면서 우리를 죽여 천국에 가게해주어 감사하다고 말하는 장면이 그랬고, 중간중간 의도된 인터뷰 장면들 - 의자를 가운데에 사물을 주변부에 색상과 분위기가 어우러지도록 배치한 장면들 - 이 그랬다.

(The Act of Killing)

(Grizzly Man, Herzog)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장면이라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액트오브킬링의 인터뷰장면을 보면서 계속해서 Herzog의 인터뷰장면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는 이 영화의 핵심이 아니다.
영화의 가장 중요한 것의 근처에 다가가지도 못하는 아주 주변부의 사소한 것을
영화를 공부했다는 이유만으로 보란 듯이 찾아내 보이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의 공부와 발견에 대한 기록을 블로그에 해보고 싶기 때문에
저 한 장면이 나를 블로그에 글을 쓰게한 동기가 된다.
그래서 나에겐 의미가 있다.


일단 영화에 대한 몇가지 생각들
1. '가해자'의 역사. 그리고 '영웅'의 역사
나는 며칠전 수업에서 보게된 장군의 아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는 Gangster지만 '장군의 아들'아닌가, 일본놈과 맞서 싸운다.
장군의 아들 김두환 역시 역사 속에서 사람들을 위해 일본놈과 맞서 싸운다는 이유로
그의 폭력이나 위협이 정당화 되었고, 심지어는 멋진 영웅으로서 캐릭터화 된다.

물론 이 영화의 역사적 사건도 그렇고 인도네시아의 현재 상황의 성격은 매우 다르다.
그들은(폭력배 - 판차실라 청년회, 프레만) 공산당을 대학살한 대가를 치룬 적이 없다. 아직도 권력을 쥐고 있으며 사람들을 위협하지만 정부의 입장에서는 대학살을 - 숙청이라 부르고 일견 정당하고 합당하다고 말한다. 그들이 한 일이 나쁜짓이 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처벌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을 직접 고문하고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을 강간하고 집을 불태우고, 그들의 가혹행위를 당당하게 말하는 것은, 그들이 악몽에 시달리고 술과 마약으로 '살생'의 기억을 잊으려는 노력과 그만큼 더 강한 '종교적 수준'의 이념이라는 이름의 힘이 그들의 일들을 정당하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그들이 했던 일이 얼마나 잔인하고 비인간적이고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들은 공산주의자이기때문에, 숙청하고 사라져야할 대상이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이 당연해진다. 

이 영화가 특별해지는 것은 이러한 사건을 피해자의 입장에서 다루지 않고 가해자의 입장에서 다룬다는 점이다. 이 영화의 입장은 분명하게도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누고 있고, 그 말에는 '나쁨'과 '좋음'의 경계를 그려내고 있다는 말이 내포되어있다. 아직까지도 권력을 지닌 가해자와, 가해자가 말하는 가혹행위 - 사실은 이질적인 장면들이 넘치는 이 영화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하는 의문을 지울 수가 없다.

2. Sympathetic 
그래서 이 영화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명한 대신에, 주인공 Anwar에 대한 인간적인 sympathy 역시 담아낸다. 사실 동정이라고 말하기는 뭐하고, 비인간적인 일을 일삼은 Anwar를 인간으로 그렸다고는 말할 수 있겠다. 특히나 마지막에 구역질을 하는 모습으로 영화를 마무리한다는 점이 그렇다. 사실은 영화의 전체적인 톤에 깔려있는 이 Sympathy에서 나는 Herzog를 발견했는지는 모르겠다. (다시 말하지만 이는 중요하지 않다..)

가해자들에게 대학살을 재연해보라?

영화는 주로 이러한 문구로서 홍보되었는데,
내가 저 문구를 만나기 전에 영화를 보게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저 문장에서, 난감해하는 가해자의 얼굴이 그려지지만,
영화에서는 웃고 있는, 아이들 앞에서도 대학살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이들을 만나게된다.
물론 난감해하는 장면들도 종종 등장한다. 중국인이었던 아버지가 대학살에서 쥐도새도 모르게 죽고 시체로 돌아온 이의 이야기를 눈앞에서 듣는 것, 그리고 자신이 죽였던 바로 그 방법으로 고문당하고 죽는 장면을 촬영하는 것. 재연만으로도 휘감는 공포. 그 공포가 그들이 했던 일에 대한 대가라고 한다면, 여전히 충분하지 않다.

3. Act of Killing
그러니까, 이렇게 난감하고 난해한 상황을 던져준 것 만으로도 생각할 거리가 불어나지만,
결국엔 The Act of Killing 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비단 비교적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학 '학살'뿐만 아니라
전쟁, 범죄살인 그리고 자살까지도.

자연재해에 의한 죽음이나, 병으로 인한 죽음과는 성격이 다르다.

그런데 사람이나 사회에 의한 죽음들은 사실은 다 비슷하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영화 마지막에 Anwar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들었다. 이 것이 정말로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영화였다면 그렇게라도 끝내야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는 각종 범죄자들이 많지만, 모든 살인행위가 범죄가 아니라는 것이..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도 어떤 순간에 나라의 부름에 따라서 살인행위에 가담할 수 있다는 것이. 혹은 나 역시 그렇게 될 가능성이 늘 존재해왔다는 것. 에대해 생각해본다.
특히나 모두가 군대에 가야하는 현재 전쟁 - 휴전이지만 - 중인 나라라면 더욱 그렇다.

그리고 또 이런생각이 든다.
나의 세대의 가장 큰 공포는 무엇인가.
과거의 할아버지 할머니의 세대는 일제강점기 - 식민지 시대와 한국전쟁을 겪었고, 그리고부모님 세대는 독재정권 밑에서 데모하고 싸웠다. 말하자면 우리 바로 직전 세대까지만 하더라도 늘 이러한 고문과 고통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눈앞에서 겪었던 세대다.
나의 기억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책에서나 배웠으며, 간절하게도 내가 살면서 겪지 않았으면 하는 일이다. 하지만 늘 직감적으로, 우리 세대도 언젠가 전쟁을 겪게 될 것만 같다. 어떠한 방식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그리고 실제로도, 지금 IS의 일련의 일들이나, 프랑스의 테러나, 시리아의 일이나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영화 속 인도네시아도 마찬가지고, 가까운 북한도 그렇다. 중국의 큰 땅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사실 알 수 없다.
그럼 말을 바꿔야 한다. 나의 세대의 공포가 아니라.
나, 에게 공포는 무엇인가.
아직까지는 고문과 살인의 공포를 경험한 적이 없다.
세계 2차대전의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일제식민지시대와 한국전쟁 자료들을 보면서 독재체제 하의 학생들을 보면서 단지 상상하고 마음아파할 뿐이다.
우리 세대의 시위는 비교적 평화로운 촛불시위였으며, 우리 세대의 아픔은 총과 칼보다는 현실의 차가운 벽 때문이 아니었나. IMF이후 겪은 경제위기에서 어제의 동료에게 정리해고당하고, 돈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라는 말 아래서 벌어진 '차가운 사건들'. 
작년의 사건 사고는, 사건 사고들 자체도 충격적이었지만, 이어진 더 차가운 시선들, 본질에는 관심 없고 유흥과 놀림거리로 전락해버린 사람 목숨이. 그것이 더 두려웠다.
몇몇 사람들이 놀림감으로 삼아버린 사람의 목숨이. 더 많은 사람들을 꽁꽁 닫히게 했을 것.
말로 물어 뜯고 상처주고 비교하고 경쟁하고 남 위에 서기 위해 노력하는. 그것이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일본이라는, 공산주의라는, 독재정권이라고 하는 그런 벽이 아니라. 내 옆의 사람들이 나의 인생이 벽이 되어버렸나. 아니 그런데 그만큼 차가운 사회는 아닌 것 같다. 적어도 아직은 아닌 것 같다. 따스함이 넘치는 그런 사회를 추구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 아직은 살만 한 곳 아닌가. 
그래서 나에게 늘 가장 큰 공포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다. 깜깜한 미래가 가장 두렵다.
그런데 '나'는 또 그런 사람은 아니다. 늘 계획한 미래가 그 나름대로 착착 진행된다.
그래서 나는 예측할 수 없는 미래가 두렵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살아갈만 할 것 같다.

결국 영화보다는 두서없는 생각으로 마무리 한다. 










2015년 1월 14일 수요일

[갤러리/그림] Late Turner Exhibition

 The Parting of Hero and Leander 1837

아비도스(Abydos, 현재의 사나칼레)에 살던 청년 레안드로스는 유럽의 세스토스 (Sestos)에서 아프로디테의 사제인 헤로를 사랑하게 되었다. 두 도시는 헬로스폰토스(현재의 다르다넬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레안드로스는 매일밤 헤로가 높은 탑에 밝혀둔 횃불에 의지하여 수영으로 해협을 건너갔다. 하지만 폭풍이 일던 어느 날 밤, 횃불이 꺼지고 레안드로스는 파도에 휩쓸려 실종되었다. 헤로는 연인의 시체를 해변에서 발견하고 절망에 빠져 탑에서 몸을 던졌다. 
(네이버 블로그 출)

The Blue Rigi, Sunr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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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트 모던은 좋아한다고 말해도 될만큼 여러번 갔지만 테이트 브리튼은 처음이었다. 감사하게도 얻은 평일의 휴일 느즈막히 일어나서 갤러리에 갈 수 있다는 사실도 좋았다. 지금은 비록 비가 와서 코스타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지만, 역시 나오길 잘했다.

테이트브리튼은 꼭 다시 한번 아니 여러번 가서 찬찬히 보고싶다. 얼핏 봤는데도 눈길을 사로잡는 작품들이 여럿이었다.

물론 오늘의 목적은 터너의 전시였다. 
테이트 브리튼은 터너의 전시를 꾸준히 해왔는데 나는 본적이 없었다. 얼마전에 터너에 대한 영화도 나왔고, 영국이 가장 자랑스러워하고 사랑하는 화가가 아닐까?
얼핏 떠오르는 이미지는 몽환적으로 번져진 빛과 아른아른한 파스텔톤의 색감 바다, 파도, 절벽진 산, 완만한 곡선, 태양, 안개 대부분 풍경이 주는 아른감...?
오늘 전시는 그의 60대70대에 그린 후기 그림이다. 삶의 노하우가 그대로 축적되기도 하였고 나이가 들었어도 건재했다. 사실은 그래서 후기작품의 작품상의 특징보다도 약간은 통통한 영국의 런던출신 할아버지가 자신의 노후를 어떻게 보내는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갤러리에는 유독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았고 구 당시에 1800년대에 그림을 그리던 터너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돌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만큼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의 경험이나 현재 상황 같은 것이 어떻게 그림감상 환경에 영향을 줄 수 있을까 생각한다. 터너의 색감이나 분위기가 좋았지만 이 전시는 우리나라에서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영국의 자랑이기 때문에 그들의 자부심이 느껴지는 전시가 외딴 곳에서 통할 수 있을까. 약간은 overly priced되었다는 느낌도 들었다. 작은 스케치 특히 여행과 바다 스케치가 많았지만, 굉장한 그림들도 많았다. 제일 먼저는 The hero of a hundred fights 1800-10 텍스쳐나 색감이나 굉장히 강렬해서 다른 터너의 그림과는 느낌이 달랐다. 그래서 그런지 옆에 놓여진 터너의 Death Mask를 보면서 이 사람은 생전 어떤 사람이었나 궁금해지게 된다. 풍채는 글쎄, 웃음 많은 아저씨였을 것 같은데 때로 굳어지는 표정은 자신만의 세계 넘어로 분명히 무언가 어두운 부분이 있을 것만 같아. 대부분의 blurry 한 그림들은 따뜻하고 축축한 차갑고도 가벼운 참 영국다운 느낌을 주는데 아무튼 그게 무엇일까 곰곰히 생각을 해보다가 The Blue Rigi,Sunrise (스위스의 리기산/그는 노후에만 다섯번 스위스를 갔다) 를 만났을때. 그래 이 사람은
그 그림 자체에서 아우라를 뿜어낸다기 보다도 이 사람이 보는 세상이 그리고 그가 그려낸 그림들이 음..다시말해서 그가 아우라를 그려냈가는 인상을 받았다. 크지 않지만 투명하고도 마냥 차갑지만은 않은 파란 색감이 정말로 빛나고 있었다. 가장 좋아하는 파란색이었고 테이트 모던에서 이제는 사라진 바닷속의꿈 보다도 더 몽환적이며, 가장 좋아하는 수족관의 색감이었다. 터너의 그림은 대체로 하나하나 보는 것보다는 멀리서 한번에 볼때 더 강한 인상을 주는 것 같다. 계속해서 보게되고 또 보고싶은 contemplation? 맞다면 맞다. 그래서 전시가 한정이라는 것도 좀 아쉬웠고. 그런데 이상하게  The Parting of Hero and Leander 이그림이 제일 좋다고 생각했는데 다 보고 다시 보러 돌아왔을 땐 아니었다. 그림 인상이 이렇게 빠르게 변한적도 처음인 것 같다. 처음보는 최고의 파도표현과 바다와 신화속 에피소드를 루벤스보다도 멋지게 그려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와서 보니 파도도 하늘고 약간 평범했다. 폭풍치는 날은 터너가 전문이긴 할텐데. 


Blue Rigi는 엽서를 하나 샀는데 많이 아쉽다. 늘 그렇다. paul klee도 심지어는 리히텐슈타인도 여전히 printing은 정말 아주 조금도 따라가지 못한다. 모작은 모르겠지만 기술의 발전을 통해 이루어낸 그림 복제는 아직 의미가 덜하다. 그러니까.....내가 지금 배운 이론적 틀이 몇개가 없으니계속 그것을 들이대고 마는 것이 좀 아쉽다. 전체적으로 좋은 전시였으나, 약간은 아쉬운감이 있는, 테이트 브리튼은 꼭 가봐야할. 그런 하루

2015년 1월 9일 금요일

[갤러리/ 그림 / 영화] Art and Cinema


시험이 끝났다
발로 썼는지 손으로 썼는지는 모르겠고 정신없는 세시간이었는데 그다지 내용이 알차지는 않았다. 저녁약속이 있기는 하지만 사실 피곤해도 오늘만큼은 집에 일찍들어가기 싫은마음에 잡은 약속이다. 그리고 시간이 남아서 내셔널 갤러리에 왔다. 갤러리는 역시나 생각을 정리하기는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피곤할때나 우울할때나 멍하니 생각을 그림과 그림사이에 핑퐁 시키며 적당하게 생각의 흐름에 빠져들 수 있다. 비록 하루의 벼락치기였지만 그래도 어제 공부한 것을 배경으로 그림을 마주하게 되었다. 분명 여러번 온 곳인데 올 때마다 새롭다. 여러번 오긴 했어도 자주 온 곳은 아니라 그럴까. 아니 제대로 공부해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아니면 평소처럼 기억력이 안좋이서? 이유야 뭐든간에 난 이 갤러리에 대해 아는건 별로 없다.
어제 외웠고 오늘 쓴 내용인데 벤야민의 아우라 개념이다. 기술복제시대에 예술에서 이 아우라는 사라졌다. 아우라란 원체 복제되지 않은 원래의/진정한 예술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을 말하는데 영화나 사진의 경우에는 복제되어 대중에게서 소비되는 것으로 그 이전의 예술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를 취하기 때문에 이 아우라라는 유일무이한 개념이 의미를 잃게된다. 그런데 나는 내셔널갤러리에서 어떤 그림이 아우라를 가지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일단 첫번째는, 음 조금 다른 얘기지만 영화이론에 대해 이야기할때 이론가들은 상대적으로 다른 예술의 영역을 상당히 단순화시켜버린다. 나는 영화를 공부함으로서 그러한 인식체계에 익숙해졌고 다른 예술과 차별되는 차원 온전한 영화적인 문법이 구사되는 예술로서의 영화 개념을 이해하게 되었다. 물론 부분적으로 이는 틀린말이 아니다. 클로즈업, 카메라 무브먼트, 편집 과 같은 것은 영상만이 가지는 고유한 성격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나는 막상 내셔널 갤러리에서 이러한 외침이 약간은 겸연쩍다는 생각이 들어버렸다. 테이트모던이라면 모를까. 근대화의 예술. 근대의 문명을 살아있는 역사를 가진 미술작품앞에서 논하는 일이 약간은 부끄러워졌다. 맞다. 영화는 인문학의 총아가 될 자격은 있다. 그런데 분명 멈추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동감있게 살아 움직이는 그림들과 프레임화 되어있음에도 상상할 수 있는 off screen space를 그림에서 만나게 되었다. 약간의 틀어진 입술 하늘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그저 그런 종교화를 얼마나 생동감있게 심지어는 발칙하게 만들어주는지 또 새삼 감탄하게 되었다. 바쟁이 말한 것처럼 과연 사진의 탄생은 예술의 두가지 추구방향 중 하나, 현실을 그대로 보존하고자 했던, 를 충족시켰을까. 말도안되는 소리. 그래서 사진은 놀랍지만, 그림 앞에서 소리낼 수 없다. 나는 아직 내 귀가 따가워지고 눈이 즐거워지는 사진을 만난적이 없다. 멋진 사진들이 있지만, 나는 더 멋진 그림들을 많이 만났다. 이것은 개인적 경험임으로 크게 의미를 가지지는 않는다. 물론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고 재생산하게 된 것 이 주는 의미도 있을테지만...글쎄.
나는 그리고 그림 앞에 서서 생각했다. 이 것이 주는 감동이 아우라인가? 글쎄다. 재미있게도 나는 그것은 인상이나 impression이나 영감 inspiration일 수 있어도 아우라와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내셔널갤러리의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인 이명박 닮은 얀반아이크의 작품. 그것은 이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작품이지만 나는 그것의 아우라를 느낄순 없었다.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아서인가. 상징적인 개념이기 때문일까. 아우라라는 종교적 영적 존재의 근원이 유일성 진정성 원조 라고 해석했으나 나는 그 아우라가 오히려 접근하기 힘들고 멀리 있을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비너스 상을 보거나 반 고흐의 그림을 만난다고 한들 나는 엽서나 사진보다 더 선명한 색감과 생생한 질감에 감탄하고 이래서 실물을 보라고 하는구나 느낄 수 있지만, 많은 경우 그것들은 나의 삶에 의미를 가지지 않기 때문에 아우라라는 것이 잘 다가오지 않는다. 또한 언제든지 접할 수 있다라고 하는 대상의 속성은 아우라를 분명 반감시킨다. 이건 그래서 복제의 개념과도 유사할 것이다. 그런데 또 복제되었다고 하여 고유의 기운은 잃는 것은 아니고, 아무튼간에 생각할 수록 복잡하다.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루벤스의 삼손이 머리카락 잘리는 장면. 색감때문에 멀리서도 한눈에 보이지만 스토리를 들었고 표정 하나하나를 보게 되어 더 기억에 많이 남는다. 인상적이었는데, 그래도 여전히 갤러리를 나가면서 아우라의 실체가 좀 애매해졌다. 루벤스가 그린 저 여인의 실물과 그 밑의 일반 사람이 잘따라그린 그림,그리고 내가 카메라로 단숨에 복제해버린 이미지는 어떻게 많이 다른가? 미래엔 과거의 스튜디오나 지금의 영화현장처럼 많은 도구나 마이크 거대한 카메라 와 같은 것이 점점 필요하지 않게될 것이다. 기술이 발전하는 속도는 너무 빠르고, 그 과정 속 영화 이론이 주목한 장치이론, 영화관 내의 환경과 관객성에 대한 이론 은 벌써 의미가 많이 퇴색되지 않나. 특히 기술과 관련된 이론들은 어려움을 겪는다. 과거 20년대의 세트장을 보면서 거대한 기구들이 존재하지만 이를 삭제하기 위한 framing과 editing이  존재한다고 했다. 맞는 말인데, 그런데 과연 미래에 정말로 눈에 부착되어버린 카메라와 시공간의 제약이 사라진 영상 기록기는 리얼리즘의  측면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나. 현실에 그대로 존재하는 경계없는 연기는 프레임없이 전달될 수 있으며, 영화는 네모난 프레임에서 빠져나오게 되었을 때 완전히 새로운 영역에 들어서게 될것이다. 생각만 해도 설레이지만 머지 않았다고 본다. 스크린 혹은 프레임이라고 하는 경계가 사라지고 연기/내러티브와 현실의 경계가 혼돈되고 그 사실 자체가 주는 또다른 attraction/distraction 이 개념은 또 대입은 된다만, 내가 상상하는 미래 영화는 그렇다.
뭐 변함없이 갤러리에 그림은 그 자리에 있을테고, 살면서 유일하게 아우라를 느꼈던 피라미드도 그 자리에 있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