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31일 일요일

Rainbow

Rainbow

무지개 동화

무지개를 보고 동화를 쓰지 않는 것은 무지개를 내려 놓은 하늘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둥근 아치 모양의 끝은 보이지 않았지만, 가장 높은 꼭대기에서 부터 이야기거리를 잔뜩 들고 줄지어 내려오는 '작고도 큰 것들'이 있었다.
이 '작고도 큰 것들'은 말하자면 요정같은 존재라서, 내가 무지개를 볼 수 있는 기숙사 7층에서는 아치 위를 종종걸음으로 걷는 개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동차보다도 큰 제법 묵직한 모양새를 한다.
이 요정같은 것들이 들고오는 이야기거리란 무지개 색처럼 달콤하고 반짝이지는 않지만, 설레임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옮기는 얼굴엔 불안감도 가득하니 내가 얼른 무지개가 사라지기 전에 이야기를 하나 빼내와서 대신 적어내려 가기라도 하는 일이 옳은 일이라 생각했다.
무지개와 무지개 요정과 하늘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



#1
소녀가 태어났을 때 이미 소녀는 혼자였다.
소녀를 돌보아 주는 보모와 수행기사와, 소녀가 가장 사랑하는 폴이 있었기에 소녀는 외로움을 알지 못했다. 싸우거나 귀찮게 굴거나 잔소리하는 부모님이 없으니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고 소녀는 생각했다.
소녀는 자신의 시간을 스스로 사용하는 법을 알았다. 아침에 일어나 가볍게 스트레칭을 20분, 또 씻는데에는 30분 정도, 식당까지 내려가는 데 7분, 식사하는 데 35분, 일어나서 방으로 돌아오는 건 9분정도로 창문이 난 길을 따라 걸어온다. 보모가 추천해주는 옷으로 갈아입는데 12분 그리고 예쁜 구두를 신고 폴과 함께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걸어 대문을 열 때까지 또 20분. 그렇게 시간을 맞추고 나면 소녀는 스스로가 자랑스러워졌다. 쓸데 없이 보내는 시간이 단 한 순간도 없다니! 아마 나는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야! 소녀는 늘 그렇게 생각했다.
대문을 나선 소녀는 갈 곳이 없었다. 소녀는 태어났을 때 부터 늘 소녀였다. 그래서 어디에 가야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소녀는 무료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폴이 기뻐할지 궁리하다가, 점심 메뉴를 보모와 함께 정하고 오늘의 요리를 곰곰히 생각하다.
배우고, 이제는 내일의 계획을 세우면 된다. 소녀는 소녀의 삶이 완벽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 누구도 방해하지 않고, 자유롭고, 외롭지않고 사랑도 있다면 불필요한 것은 필요가 없다.
하지만 소녀는 그 생각을 너무 자주 했다.
자기 자신이 행복하다고, 그 삶이 완벽하다고, 그 누구보다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비가 오는 날에도 소녀는 대문 앞에 앉아 폴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오늘 소녀에겐 두명의 보모와 세명의 수행기사가 있다. 빵을 쥐어주고 다른 대문으로 내모는 소녀의 완벽한 삶이 반복된다.

[2013년 언젠가의 글]


2015년 5월 30일 토요일

논어 - 인문학 특강

"好學"(학문을 좋아함) 에 대하여 

물음이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시간

論語(논어) - 孔子의 어록과 제자들의 문답을 담은 유교 경전

: 논어를 현대의 맥락에서 그리고 일상 속에서 적용 될 지혜로 이해할 것!

子曰:「學而時習之,不亦說乎?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人不知而不慍,不亦君子乎?」

공자가 말하기를: 
"배우고 틈나는대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하겠는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아니하여도 노여워하지 아니하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1 好學 "현실과 이상의 차이를 어떻게 매울 것인가? 인간이라면 '배움'을 통하여 채워나간다."
: 유일신 문화 (유일신이 창조하고 심판하는) 에서라면 '믿음'에서 시작했을 테지만, 
만물신과 조상신을 믿는 동양문화권에서는 '사람'을 중요시하여 '學'으로 논어를 시작한다.
(또한 공자 사상이 나를 살찌우는, 자신을 위한 배움(위기지학), 학문을 좋아하는 태도 (好學)를 중요시 함을 옅볼 수 있는 대목이다.)
: 학문은 왜 중요한가? 
"好仁不好學, 其蔽也愚; 好知不好學, 其蔽也蕩; 好信不好學, 其蔽也賊; 好直不好學, 其蔽也絞; 好勇不好學, 其蔽也亂; 好剛不好學, 其蔽也狂"
"인자하기를 좋아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우둔해지는 것이고, 지혜롭기를 좋아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까불게 되는 것이고, 믿음직스럽기를 좋아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자신을 해치는 것이고, 곧기를 좋아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가혹해지는 것이고, 용맹스럽기를 좋아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난폭해지는 것이고, 굳세기를 좋아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무모해지는 것이다."
"사랑을 앞세우면서 배우려 하지 않으면 어리석은 짓을 하고, 지혜를 앞세우면서 배우려 하지 않으면 제멋대로 굴고, 믿음을 앞세우면서 배우려 하지 않으면 상대를 다그치고, 정직을 앞세우며 배우려 하지 않으면 혼란을 부추기고, 강직함을 앞세우며 배우려 하지 않으면 통제 불능이 되는 것이다." 
: 배움이 현실과 이상의 간극을 어떻게 메울 수 있는가에 대한 통찰이자,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데에 배우지 않아 생기는 어리석음에 대한 통찰. 
: 삶이 고비를 넘는 일이 힘들고 불안하기에 이에 집중하게 되는데 삶을 넓게 보면 삶이란 고비를 넘은 다음이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신정근 교수) 

#2 정치 "近者說遠者來" 근자열원자래
"가까이 있는 사람은 기뻐하고, 멀리 있는 사람은 오게하는 것이다."
이는 비단 나라의 정치와 백성과 관련되어 있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 관계 전반에 걸쳐 적용 될 수 있는 것으로. 사람이란 무릇 가까이 있는 사람은 기뻐하도록 멀리 있는 사람은 절로 와 머무르게 하도록 하였을 때 군자 됨이 아닌가.
: 자신을 갈고 닦아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하고 공경스럽게 대하면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준다. 스스로 적용자가 되고 예외자가 되지 않는 것. <-> 포퓰리즘 ; 대책 없는 텅 빈 말. 
: "도움을 주지만 낭비하지 마라. (필요에 따라 주어라) 힘들게 일을 시키지만 원망을 듣게하지 마라. 욕심이 있어도 탐욕을 부리지 말고, 느긋하지만 교만하지 않고, 위엄을 차리지만 사납지 않은 것을 말한다."
:"사람들이 멀리서도 그 모습을 보고 두려워 한다면 위엄이 있지만 사납지 않은 것이다."(군자는 의관을 정제하여야 한다. 위엄있지만 사납지 않고, 눈빛이 흔들리지 않는다.) 

#3  다른 이를 받아드리는 방법 (관용/용서)
: 나의 평생의 좌우명이자 삶을 사는 지혜로 여기는 역지사지가 이 단어안에 있다. 
: "새 출발을 하려면 도우면 되지 물러나려면 내버려 두라. 과거 때문에 받아드리지 않을 필요가 없다" 사회적 편견과 신분을 떠나 '사람'이라는 공유지대에서 만나다. 나의 공유 지대에 누군가를 불러 오는 일이 결국은 사랑이 아닌가?
: Golden Rule 내가 원하는 것을 다른 이에게 하라. 다른이가 나에게 시키지 않길 바라는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마라. 
But, 극단적 프라이버시/개인주의 (내가 너에게 관심을 끌테니 너도 나에게 관심을 가지지 마라) 혹은 가학증 (너도 맞는 것이 좋다면 나도 맞아도 좋다 - 피해의 거래가 성사) 로 오용, 낙용될 수 있다.
관용 : 나와 다르더라도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받아드릴 수 있다.
갈등의 이유는 자기중심적 사고가 된다. '서'가 이루는 세계는 그것이 인으로 나아가는 방향으로 환대하는 세상 신뢰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공유지대로 타인을 초청한다. 
: 온양공검양 (온화하고, 착하고, 공손하고, 검소하고, 겸양하니까 저절로 그렇게 된다.)
: 욕심은 에너지이자 원동력이 되지만 탐욕은 자신을 파괴한다. 탐욕을 경계한다. (계탐도) 탐을 넘지 못하면 '서'로 나아갈 수 없다. 


참고 : EBS 신정근 교수 인문학 특강 1, 2, 3강 

2015.6.1

2015년 5월 19일 화요일

2015년의 사회를 보고 쓰는 어떤 하나의 의견

2015년의 사회를 보고 쓰는 어떤 하나의 의견
A Perspective towards the Society of the Year 2015

[칼럼]
내가 현대 사회에 가지고 있는 의문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때때로 많은 경우에서 대다수가 이끌어가고 있는 현상이며 이른바 '대세'이다.
이에 '따라서' 편승해야 한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지만, 마냥 그 현상들을 부정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예를 들어, 평소 '말세' 나 '요즘 애들이~' 라는 말들을 내가 다른 세대의 사람도 아닌데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사회부적응의 면모를 보이는 것 아닌가.
어쩌면 지금 나에게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가치들이 이후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고, 그럼에도 절대 불변하는 것이 있으리라고 믿고 있기는 하지만, 이 믿음 역시 현재를 부정하여도 좋다는 핑계거리로는 충분하지 않다.
(예를 들어 애초에 이러한 - 지식인 코스프레 - 말투 역시 시대착오적이지는 않은가 우려하게 된다.)

사회에 적응하고자 하는 필사적인 노력과 사회적으로 교육받고 형성되고 스스로 끊임없이 쌓아온 것들이 심심치 않게 부딪히는 것은 결국 지금의 내가 규정되기 어려운 애매모호한 상태로 지속되도록 만든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불만은 없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대세'의 불편함의 몇 가지이다. (이는 차후 수정/추가 될 수 있다.)
1) 연애 강박 미디어 - 특히 '마녀사냥' 등은 상당히 불편하다. 뒷담화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인상과 여전히 사회 전체에서는 통용되고 있지 못하는 가치들을 표면에서 논쟁함으로서 세대간의 격차 혹은 괴리를 가중하고 있지는 않은가. <-> 전혀 반대로, 지금의 젊은 세대에서 현존하고 있는 그러나 논의되지 못하였던 '현상'을 양지로 끌어오는 시도로 보여질 수도 있다. 따라서 지금으로서는 몇몇 관객들 (나를 비롯한) 에게 충분히 소통되지 못하지만, 미디어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과 관심 - 시청률과 언론보도로 이어지는 - 은 이후의 트렌드를 이끌어가는 선구자적인 역할을 한다.
+ 그런데 결혼장려도 아니고 연애를 장려하는 미디어가 사회적으로 어떠한 기여를 하고 있는지 잘 이해하지 못한다. (이 것은 정말로 개인적인 견해로 -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 혹은 관계는 본능적이고 당연한 부분이기에 이를 부정하고 싶지도 않고 그것이 이 글을 작성하는 목표도 아니다. 또한 관객에게 가장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 있고 지속적으로 관객을 동원할 수 있는 안정적인 콘텐츠라는 것 -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지 보려는 것이다.) 지금 떠오르는 바로는 두 가지정도가 있는 것 같은데. 하나는 미국의 대중매체에서 - 예를 들면 디즈니 - 빈번하게 사용 된 '결혼의 신격화(idealised or mythical)'로, 결혼의 장려는 출산과 인구증대-> 더욱 효율적이고 강력한 사회 구축에 기여할 것이다. 따라서 연애의 장려는 결혼의 장려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두번째로, '썸'열풍은? (이는 기본적으로 결혼을 전제로 하거나 목표로한 인간관계가 아니라 연애의 전초전 정도로 보인다.)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물론 연애 자체에도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부여되어 있다. 이 역시 크게 두 가지로, '이성애자 양성' , '사회적 젠더 구성'이다. 둘다 젠더 이데올로기에 대한 것으로, 대한민국의 매체에서는 아주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몇몇의 동성애 트렌스젠더의 방송인들) 대부분이 이성애를 기본 전제로 한다. 이성애에 대한 장려는 다른 관계를 금기시한다. '사회적 젠더 구성' 이라는 측면에서는, 미디어에서는 빈번하게 여성과 남성의 역할을 구분하고 이를 재현하는데 그것이 연애 / 러브라인에서는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각종 리얼리티 예능과 토크쇼 등에서 여성 게스트와 남성 게스트를 수식하는 말들을 분석한다면 이해될 것이다. 가장 단순하게는 여성과 남성이 좋은 외모를 지닐 수록 사소한 행동에도 많은 호응을 얻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장난과 놀림거리의 대상으로서 주목한다. (그러나 미디어가 부여한 남성과 여성의 이미지라고 하는 것이 지금 시대에는 카테고리화하기 힘들 정도로 분화되어 단순화 시키기에는 한계가 있다. 여성만 하더라도 청순/섹시/국민여동생 남성의 경우 초식/짐승/지적인 등의 수식어가 번갈아가며 트렌드를 교체시키는데 더더욱 많은 예외가 등장한다.) 혹은 몇몇의 연애를 주제로한 프로그램에서 이야기 하듯 '어떻게 하여야 남성/여성이 좋아한다.' '어떻게 하여야 남성/여성에게 매력을 어필할 수 있다.' 하는 등의 가이드라인이 일종의 '연애 이데올로기'를 구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여성이 좋아/싫어하는 남성의 패션 스타일 등은 획일화된 남성상에 기여한다. 특히나 트렌드에 민감한 현대 대한민국 사회의 젊은이들의 경우 이러한 몇몇 목록에 더욱 열광적으로 반응한다.

2) 언어 파괴 - 언어를 특히 글을 사용할 수단이 카톡/이메일 등으로 수렴되어, 이러한 매체의 특성에 적응된 언어의 사용이 가속화 된다. 특별히 글을 쓰는 사람이나 문과를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더욱 그러하다. 이에 대한 우려는, 앞으로도 간소화된 언어가 대세로 자리잡고 더더욱 가속화 될 것이라는 점이다. '언어'가 사람의 사고방식, 세계관, 문화 등을 상당부분 (아니 거의) 결정짓는다고 할 때 간소화된 언어는 더욱 풍부해 질 수 있는 사고(생각)을 제한한다. 예를 들어, '~어떠하다'고 생각되고 지속될 수 있는 이야기들의 가능성들이 '헐, 대박' 이라는 언어에 의하여 단절되어버리는 것이다. 간소화된 언어를 일상생활에서 지속적으로 사용하다 보면 실제로 어떠한 기분이나 생각을 표현하려고 할 때 어떠한 방식으로 해야할지 어려움을 느끼게 되고, 단순한 표현으로 간소화된 감정과 순간들은 이후에 기억되기 어렵거나 반감된다. <-> 따라서 언어/텍스트 외의 대체 수단이 훨씬 더 중요해진다. 예를 들면 사진과 동영상과 같은 시청각적인 언어로서 상황, 기분을 표현하고, 경계없는 '예술' 의 영역; 음악, 춤, 육체, 기술, 그림, 조형 등을 통하여 여전히 사고하거나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언어의 간소화가 사고의 제한으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다양하고 혁신적인 언어표현으로의 발달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려를 표한다. 여전히 삶에서 글자와 언어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상당하다. 특히나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소통하는 가장 주요한 수단이 말이다. 스스로 눈을 감고 생각하는 수단도 언어다. 사람은 언어 밖으로 단 한발짝도 나갈 수 없다는 말이 (심지어는 무의식의 세계에서도) 나는 지금의 사회에서도 여전히 통용된다고 본다. 따라서 대체의 수단이 충분하게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급격한 언어의 파괴는 문제가 된다.
+ 또한 연애의 장려는 다른 사회적 문제에 대한 가장 쉽고 환상적인 개인적 차원의 해결로, 이를 장려함으로서 개개인의 현실적인 문제들, 취업되지 않고 불평등한 사회라고 하는 사실- 을 어느정도 무시하도록 한다. 의식적으로 이를 연애와 로맨스의 획득을 통해 해소하는 것처럼 보이도록한다.(이것이 뮤지컬과 로맨스 내러티브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특징)

3) 포기의 합리화
자기계발이 시대는 지나갔다. 그러니까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아프면 병원가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힘들고 팍팍한 세상에 아픈 것은 당연하고 하며 이를 아름다운 말로 치유해주는 일들이 그다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전세계의 경제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으며, 어디를 가든 취업이 어렵다한다. 일하지 않으면 돈을 벌 수 없고, 돈을 벌지 못하면 살아가기 힘들다. 선택과 집중의 원칙에 따라 포기해야하는 것들이 많이 생긴다.
사실은 사회 전면의 '포기' 트렌드를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하고 싶고, 이해해야한다고 그래서 결국엔 사회전체와 국가차원의 문제에서 그 원인을 찾고 해결해야한다고 말하고는 싶지만, 나는 때때로 아픔을 핑계로 쉬운 포기를 택하는 나약함 역시 사회에 만연하다고 말한다. (이 문장을 쓰는 나 자신이 극도로 보수적이라는 생각에 고민하게 된다. 개개인의 아픔을 완전히 이해하거나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사실에 또 우려하게 된다.) 그래서 김승옥 소설의 하나의 구절을 불러온다. "날이 갈 수록 내 도피의 어리석음이 드러났다. 미워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반항하는 법을 배웠더라면 나의 괴로움은 진작 서울에서 무마될 수 있을 거이다."(환상수첩, 59) 요컨데, 사회의 만연한 도피와 포기의 합리화의 원인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문제 해결능력의 부재에 있다고 순화시켜 말한다.
내가 발견하는 가장 표면적인 현상은 성형 열풍이다. 대한민국은 성형공화국이다. 성형의술 (혹은 기술?)은 극도로 정교하게 발전되어 이제는 티나지 않게 쉽고 간편하게 저렴하게 빨리 자신의 외모를 변화시킬 수 있다. (더 이상 여성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그런데 젊은이들이 자신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가장 적극적이고 진취적이고 희생 (고통과 돈)을 담보로하는 행동이 성형이라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성형을 통하여 가장 빠르게 자신의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다고 하는 믿음과 또 실제로 존재하는 즉각적인 효과들이 더욱 성형을 부추긴다. 예를 들어 작은 시술로 예뻐진 친구가 그 이전에 비해 이성에게 많은 인기를 얻고 다른 분야에서도 긍정적인 결과를 낸다면 주변 사람들은 이를 좋은 '문제해결방안' 이라고 믿는다. - 말하자면, 예쁨/잘생김이 만병통치약! - 성형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도 많이 변화했으며, 자신의 컴플렉스를 극복하고 자신감을 얻는 도구 / 건강상의 수술이 심미적으로도 가능해짐 / 성형산업의 확대로 세계의 중심지로서 기대하는 경제효과  등의 순기능도 물론 무시할 수 없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성형은 자신의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노력과 도구 중 가장 쉽고 나약한 선택이다. 외모지상주의에 스트레스를 받아 외모지상주의를 부추기는 선택을 하고, 외모지상주의의 너머에 있는 자본주의의 굳건함 (돈만 있으면 다 된다고하는) 에 기여하고 결국에는 기득권의 바람대로 사회구조가 형성되는 (마음대로 비약하자면) 이러한 순환구조를 영속시키는 것 아닌가. 성형 열풍에 대해서는 더욱 다차원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또한 이 역시 미디어, 스타시스템, 광고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에 '젊은이의 나약함'이라는 표현으로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음이 사실이다.


쓰다보니 극도로 보수적인 글이 되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말았다. 이런 식의 논리는 사회를 흔드는 데에는 그다지 기여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현재 뿌리내린 사회 전반의 보수화에 나 역시 편승한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마저 든다. 이럴 때 '정치적 보수화' 와 '사고의 진보화'가 표면적으로 충돌하고 있는 젊은이들과 '정치적 진보화'와 '사고의 보수화'가 충돌하고 있는 나, 무언가가 어떤 지점에서 부딪히고 있는지가 명확하지는 않다. 아니 애초에 진보니 보수니 하는 양극의 프레임으로는 설명되어지지 않는다. 더 좋은 글쟁이라면 조금 더 넓게 사회를 볼 수 있을까. 내면의 만연한 불안감이 글에 묻어난다. 더 많은 이들이 나의 글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좋겠다. 평소와 같은 시니컬함으로 무시한다면 좋겠다.

Published 19 MAY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