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Perspective towards the Society of the Year 2015
[칼럼]
내가 현대 사회에 가지고 있는 의문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때때로 많은 경우에서 대다수가 이끌어가고 있는 현상이며 이른바 '대세'이다.
이에 '따라서' 편승해야 한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지만, 마냥 그 현상들을 부정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예를 들어, 평소 '말세' 나 '요즘 애들이~' 라는 말들을 내가 다른 세대의 사람도 아닌데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사회부적응의 면모를 보이는 것 아닌가.
어쩌면 지금 나에게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가치들이 이후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고, 그럼에도 절대 불변하는 것이 있으리라고 믿고 있기는 하지만, 이 믿음 역시 현재를 부정하여도 좋다는 핑계거리로는 충분하지 않다.
(예를 들어 애초에 이러한 - 지식인 코스프레 - 말투 역시 시대착오적이지는 않은가 우려하게 된다.)
사회에 적응하고자 하는 필사적인 노력과 사회적으로 교육받고 형성되고 스스로 끊임없이 쌓아온 것들이 심심치 않게 부딪히는 것은 결국 지금의 내가 규정되기 어려운 애매모호한 상태로 지속되도록 만든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불만은 없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대세'의 불편함의 몇 가지이다. (이는 차후 수정/추가 될 수 있다.)
1) 연애 강박 미디어 - 특히 '마녀사냥' 등은 상당히 불편하다. 뒷담화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인상과 여전히 사회 전체에서는 통용되고 있지 못하는 가치들을 표면에서 논쟁함으로서 세대간의 격차 혹은 괴리를 가중하고 있지는 않은가. <-> 전혀 반대로, 지금의 젊은 세대에서 현존하고 있는 그러나 논의되지 못하였던 '현상'을 양지로 끌어오는 시도로 보여질 수도 있다. 따라서 지금으로서는 몇몇 관객들 (나를 비롯한) 에게 충분히 소통되지 못하지만, 미디어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과 관심 - 시청률과 언론보도로 이어지는 - 은 이후의 트렌드를 이끌어가는 선구자적인 역할을 한다.
+ 그런데 결혼장려도 아니고 연애를 장려하는 미디어가 사회적으로 어떠한 기여를 하고 있는지 잘 이해하지 못한다. (이 것은 정말로 개인적인 견해로 -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 혹은 관계는 본능적이고 당연한 부분이기에 이를 부정하고 싶지도 않고 그것이 이 글을 작성하는 목표도 아니다. 또한 관객에게 가장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 있고 지속적으로 관객을 동원할 수 있는 안정적인 콘텐츠라는 것 -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지 보려는 것이다.) 지금 떠오르는 바로는 두 가지정도가 있는 것 같은데. 하나는 미국의 대중매체에서 - 예를 들면 디즈니 - 빈번하게 사용 된 '결혼의 신격화(idealised or mythical)'로, 결혼의 장려는 출산과 인구증대-> 더욱 효율적이고 강력한 사회 구축에 기여할 것이다. 따라서 연애의 장려는 결혼의 장려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두번째로, '썸'열풍은? (이는 기본적으로 결혼을 전제로 하거나 목표로한 인간관계가 아니라 연애의 전초전 정도로 보인다.)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물론 연애 자체에도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부여되어 있다. 이 역시 크게 두 가지로, '이성애자 양성' , '사회적 젠더 구성'이다. 둘다 젠더 이데올로기에 대한 것으로, 대한민국의 매체에서는 아주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몇몇의 동성애 트렌스젠더의 방송인들) 대부분이 이성애를 기본 전제로 한다. 이성애에 대한 장려는 다른 관계를 금기시한다. '사회적 젠더 구성' 이라는 측면에서는, 미디어에서는 빈번하게 여성과 남성의 역할을 구분하고 이를 재현하는데 그것이 연애 / 러브라인에서는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각종 리얼리티 예능과 토크쇼 등에서 여성 게스트와 남성 게스트를 수식하는 말들을 분석한다면 이해될 것이다. 가장 단순하게는 여성과 남성이 좋은 외모를 지닐 수록 사소한 행동에도 많은 호응을 얻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장난과 놀림거리의 대상으로서 주목한다. (그러나 미디어가 부여한 남성과 여성의 이미지라고 하는 것이 지금 시대에는 카테고리화하기 힘들 정도로 분화되어 단순화 시키기에는 한계가 있다. 여성만 하더라도 청순/섹시/국민여동생 남성의 경우 초식/짐승/지적인 등의 수식어가 번갈아가며 트렌드를 교체시키는데 더더욱 많은 예외가 등장한다.) 혹은 몇몇의 연애를 주제로한 프로그램에서 이야기 하듯 '어떻게 하여야 남성/여성이 좋아한다.' '어떻게 하여야 남성/여성에게 매력을 어필할 수 있다.' 하는 등의 가이드라인이 일종의 '연애 이데올로기'를 구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여성이 좋아/싫어하는 남성의 패션 스타일 등은 획일화된 남성상에 기여한다. 특히나 트렌드에 민감한 현대 대한민국 사회의 젊은이들의 경우 이러한 몇몇 목록에 더욱 열광적으로 반응한다.
2) 언어 파괴 - 언어를 특히 글을 사용할 수단이 카톡/이메일 등으로 수렴되어, 이러한 매체의 특성에 적응된 언어의 사용이 가속화 된다. 특별히 글을 쓰는 사람이나 문과를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더욱 그러하다. 이에 대한 우려는, 앞으로도 간소화된 언어가 대세로 자리잡고 더더욱 가속화 될 것이라는 점이다. '언어'가 사람의 사고방식, 세계관, 문화 등을 상당부분 (아니 거의) 결정짓는다고 할 때 간소화된 언어는 더욱 풍부해 질 수 있는 사고(생각)을 제한한다. 예를 들어, '~어떠하다'고 생각되고 지속될 수 있는 이야기들의 가능성들이 '헐, 대박' 이라는 언어에 의하여 단절되어버리는 것이다. 간소화된 언어를 일상생활에서 지속적으로 사용하다 보면 실제로 어떠한 기분이나 생각을 표현하려고 할 때 어떠한 방식으로 해야할지 어려움을 느끼게 되고, 단순한 표현으로 간소화된 감정과 순간들은 이후에 기억되기 어렵거나 반감된다. <-> 따라서 언어/텍스트 외의 대체 수단이 훨씬 더 중요해진다. 예를 들면 사진과 동영상과 같은 시청각적인 언어로서 상황, 기분을 표현하고, 경계없는 '예술' 의 영역; 음악, 춤, 육체, 기술, 그림, 조형 등을 통하여 여전히 사고하거나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언어의 간소화가 사고의 제한으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다양하고 혁신적인 언어표현으로의 발달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려를 표한다. 여전히 삶에서 글자와 언어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상당하다. 특히나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소통하는 가장 주요한 수단이 말이다. 스스로 눈을 감고 생각하는 수단도 언어다. 사람은 언어 밖으로 단 한발짝도 나갈 수 없다는 말이 (심지어는 무의식의 세계에서도) 나는 지금의 사회에서도 여전히 통용된다고 본다. 따라서 대체의 수단이 충분하게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급격한 언어의 파괴는 문제가 된다.
+ 또한 연애의 장려는 다른 사회적 문제에 대한 가장 쉽고 환상적인 개인적 차원의 해결로, 이를 장려함으로서 개개인의 현실적인 문제들, 취업되지 않고 불평등한 사회라고 하는 사실- 을 어느정도 무시하도록 한다. 의식적으로 이를 연애와 로맨스의 획득을 통해 해소하는 것처럼 보이도록한다.(이것이 뮤지컬과 로맨스 내러티브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특징)
3) 포기의 합리화
자기계발이 시대는 지나갔다. 그러니까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아프면 병원가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힘들고 팍팍한 세상에 아픈 것은 당연하고 하며 이를 아름다운 말로 치유해주는 일들이 그다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전세계의 경제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으며, 어디를 가든 취업이 어렵다한다. 일하지 않으면 돈을 벌 수 없고, 돈을 벌지 못하면 살아가기 힘들다. 선택과 집중의 원칙에 따라 포기해야하는 것들이 많이 생긴다.
사실은 사회 전면의 '포기' 트렌드를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하고 싶고, 이해해야한다고 그래서 결국엔 사회전체와 국가차원의 문제에서 그 원인을 찾고 해결해야한다고 말하고는 싶지만, 나는 때때로 아픔을 핑계로 쉬운 포기를 택하는 나약함 역시 사회에 만연하다고 말한다. (이 문장을 쓰는 나 자신이 극도로 보수적이라는 생각에 고민하게 된다. 개개인의 아픔을 완전히 이해하거나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사실에 또 우려하게 된다.) 그래서 김승옥 소설의 하나의 구절을 불러온다. "날이 갈 수록 내 도피의 어리석음이 드러났다. 미워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반항하는 법을 배웠더라면 나의 괴로움은 진작 서울에서 무마될 수 있을 거이다."(환상수첩, 59) 요컨데, 사회의 만연한 도피와 포기의 합리화의 원인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문제 해결능력의 부재에 있다고 순화시켜 말한다.
내가 발견하는 가장 표면적인 현상은 성형 열풍이다. 대한민국은 성형공화국이다. 성형의술 (혹은 기술?)은 극도로 정교하게 발전되어 이제는 티나지 않게 쉽고 간편하게 저렴하게 빨리 자신의 외모를 변화시킬 수 있다. (더 이상 여성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그런데 젊은이들이 자신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가장 적극적이고 진취적이고 희생 (고통과 돈)을 담보로하는 행동이 성형이라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성형을 통하여 가장 빠르게 자신의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다고 하는 믿음과 또 실제로 존재하는 즉각적인 효과들이 더욱 성형을 부추긴다. 예를 들어 작은 시술로 예뻐진 친구가 그 이전에 비해 이성에게 많은 인기를 얻고 다른 분야에서도 긍정적인 결과를 낸다면 주변 사람들은 이를 좋은 '문제해결방안' 이라고 믿는다. - 말하자면, 예쁨/잘생김이 만병통치약! - 성형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도 많이 변화했으며, 자신의 컴플렉스를 극복하고 자신감을 얻는 도구 / 건강상의 수술이 심미적으로도 가능해짐 / 성형산업의 확대로 세계의 중심지로서 기대하는 경제효과 등의 순기능도 물론 무시할 수 없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성형은 자신의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노력과 도구 중 가장 쉽고 나약한 선택이다. 외모지상주의에 스트레스를 받아 외모지상주의를 부추기는 선택을 하고, 외모지상주의의 너머에 있는 자본주의의 굳건함 (돈만 있으면 다 된다고하는) 에 기여하고 결국에는 기득권의 바람대로 사회구조가 형성되는 (마음대로 비약하자면) 이러한 순환구조를 영속시키는 것 아닌가. 성형 열풍에 대해서는 더욱 다차원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또한 이 역시 미디어, 스타시스템, 광고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에 '젊은이의 나약함'이라는 표현으로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음이 사실이다.
쓰다보니 극도로 보수적인 글이 되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말았다. 이런 식의 논리는 사회를 흔드는 데에는 그다지 기여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현재 뿌리내린 사회 전반의 보수화에 나 역시 편승한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마저 든다. 이럴 때 '정치적 보수화' 와 '사고의 진보화'가 표면적으로 충돌하고 있는 젊은이들과 '정치적 진보화'와 '사고의 보수화'가 충돌하고 있는 나, 무언가가 어떤 지점에서 부딪히고 있는지가 명확하지는 않다. 아니 애초에 진보니 보수니 하는 양극의 프레임으로는 설명되어지지 않는다. 더 좋은 글쟁이라면 조금 더 넓게 사회를 볼 수 있을까. 내면의 만연한 불안감이 글에 묻어난다. 더 많은 이들이 나의 글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좋겠다. 평소와 같은 시니컬함으로 무시한다면 좋겠다.
Published 19 MAY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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