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수첩 , 김승옥, 1962
- 김승옥 : 1941년 생, 이 사람의 직업이 참 마음에 든다. 소설가, 시나리오작가, 영화감독, 대학교수 이 정도면 내가 원하는 것 다 가졌다. 나는 이 사람의 문체, 말투가 정말로 낯간지러울 정도로 좋은데, 친구에게 보여주었더니 '츤데레'라고 했다. 그다지 틀린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인간실격을 좋아했던것 만큼이나 아니 그것보다 훨씬 더 그의 소설이 읽는 맛이 난다. 60년대의 소설가지만, 그리고 참 때때로 마초적이라서 (상남자는 아니고 여자를 - 정말 모르면서 - 물로 보는 것 같은..) 나는 저 시대가 참 좋은데, 조선시대도 포함해서, 나는 가본 적 없는 시대에 대한 이상한 낭만주의가 있는데, 친구들끼리 저런 대화를 하며 저런 분위기에서 웃고 싶은데 도저히 여자의 몸으로는 살만한 곳은 아니구나 그런 생각이 든다. 그나마 지금 2015년을 여자 대학생으로 살고 있어 다행히구나 싶다.
환상수첩의 몇 구절..
p32
선애가 임신했을지도 모른다고 했을 때 나는 문득 아버지의 주정이 생각나서,
"애가 태어난다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했더니,
"글쎄요. 난 어렸을 때부터 말하자면 여자는 어린애를 낳아야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늘 이런 아이를 낳았으면 하고 생각했지요. 남보다 영리하고 아주 예쁘고 그런 아이를 말이지요. 그렇지만 요 근래엔..."
"...그저 밉상은 아니고...바보 비슷한 아이를 낳았으면 해요."
"왜"
"고뇌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영화나 보고 좋아하고 당구나 치고 만족할 수 있고 야구 구경이나 하며 시간을 보내고도 후회하지 않는 아주 속물로 만들고 싶어요."
"그렇지만 애가 백치가 아닌 이상 그럴 수 있을까?"
"글쎄요, 하여튼 튼튼한 백치나 낳았으면 호호호..."
p46
이미 나는 형기와 나와의 관계를 깨닫고 있었다. 형기를 사랑할 수 있는 것도 반대로 학대할 수 있는 것도 세상에서는 나뿐이었다. 내가 그의 곁에 있는 한 그는 살아갈 것이다.
p49
어머니가
"얘는 얼굴이 하야니까 감색 옷을 입으면 참 예쁠거야."
하고 말하자 아우가 계집애처럼 헤헤 웃는 걸 보고, 나는 토끼를 쫓고 있는 나 자신의 재판을 거기서 보는 듯하여, 아우만은 버스칸에서 영감님처럼 앉아 있을 수 있어주어으면 하고 가슴 아프도록 바라고 있었다.
: 당신의 토끼도 앨리스에 나올법한 그런 토끼인가요?
p59
날이 갈수록 내 도피의 어리석음이 드러났다. 미워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반항하는 법을 배웠더라면 나의 괴로움은 진작 서울에서 무마될 수 있었을 것이다.
: 내 말이 그말이네요. 하지만 진작에 계산된 도피를 하며 안도감을 얻으며 사는 삶도 있습니다.
p94
지상에 죄가 있을리 없다. 있는 것은 벌뿐이다. 벌은 무섭지 않다. 무서운 것은 죄다, 라고 떠들며 실상은 벌을 피하기 위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어리석은 나여. 옛의 유물인 죄란 단어에 속아온 아무리 생각해도 가련한 위선자여.
p96
다시 한번 말하고 싶지만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내야 한다는 문제일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더구나 그를 자살로 이끈 고뇌라는게 그처럼 횡설수설하고 유치한 것이라면 아예 세상엔 사람이 하나도 없었으리라. 그는 마지막에 가서 엉뚱하게도 죄와 벌에 관한 얘기를 잠깐 꺼내고 있지만 죄란게 있다고 한들 또 어떠한가?
불가피하게 죄를 짓게 되면 짓는 것이다. 그러나 죄의 기준이란 게 없어진 지금, 죄의 기준을 비단 죄뿐만 아니라 모든 것의 기준을 일부러 높여서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분명히 환상적인 기준을 만들어 두고 거기에 자신를 맞추려고 애썼던 모양인데 참 바보같은 놈이었다.
:그래서 당신은 또 한명의 몸뚱아리로 동시에 진심으로 여러 생각을 하는 사람이군요. 그러니 단 하나의 진심같은 것은 세상 만물의 진리가 없는 것 만큼 존재하기 힘든 것이며, 적어도 내 안에는 그것이 하나의 형태로 살아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분명히 토끼같은 것을 찾는 사람입니다. 계속해서 말입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