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4월 24일 금요일

문학은 나를 덜 외롭게 한다

실즈는 “자기 자신에게 대꾸”하는 샐린저의 책들에서 재능을 발견하고, 그 재능이 “나를 덜 외롭게 만들고, 삶을 더 살아볼 만한 것으로 만든다”고 고백했다. 마찬가지로 이 책을 읽다 보면 “의식 있는 존재”로서의 작가를 발견하고, 자신의 말더듬 증세를 자신만의 문학론으로 승화시킨 작가와 마주할 수 있다. 그와 마주 보고 있으니 조금 덜 외롭고, 아직 읽어야 할 책이 많이 남아서라도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중심을 지키고 흔들리지 않을 것
계속해서 질문하고 대꾸할 것
어릴 수 밖에없지 아마도 평생
그러니 어림을 싫어하는 것을 그만두고
그래도 어른스럽게 행동해야하겠지만

오늘의 영감
칼부코 화산 폭발


2015년 4월 13일 월요일

[영화] Blade Runner 블레이드 러너 (1982)



(Blade Runner, Ridley Scott, USA, Hong Kong, UK, 1982) 

디지털, 복제, 기술, 고도 발전 등의 키워드와 함께 영화를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 리들리 스콧 감독의 1982년 영화를 수업시간에야 처음 보게 되었다.


스타워즈 뺨치는 '미래 SF영화' 아우라를 풍기는 포스터를 타이틀 이미지로 쓰기에는 포스터가 영화를 충분히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연륜이 느껴지는 포스터를 보니 새삼 1980년대의 상상력이 얼마나 많은 것을 이야기했나 새삼 감탄할 수 밖에 없다.

*간단한 줄거리.
때는 2019년, 다른 행성의 식민지배나 인간이 하기 힘든 각종 일들을 처리하는 용도로 보급된 '복제인간(Replicant)'. 가장 진화된 형태의 Nexus 6는 인간이 느끼는 감정과 고통에 대한 경험을 이식하여 스스로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프로그램 되어있다. 그들을 제어하는 장치는 수명이 4년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 이를 극복하기 위한 복제인간들의 반란이 시작하고, 이들을 잡고 제거(retirement)하는 특수 경찰이 블레이드 러너다.

- 2019년의 현대 도시는, 화려한 지금의 샹하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스카이폴에서 촬영된 상하이를 보니 말이다.) 
- 80년대에 만연한 동아시아에 대한 우려와 공포는 과연 현실이 될까. 현재 진행형이다, 물론 일본이 아니라 중국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으로 가득.
- 인간과 기계를 구분 할수 있는 것이 과거의 감정적인 경험이라고 한다면, 정말로 이를 극복한 기계가 있다면 그것은 왜 인간이 아닌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인간의 '눈'에 대한 믿음.
- 사진을 확대하거나 영상통화공중전화로 전화를 하는 모습, 2015년의 우리는 걸어다니면서 영상통화를 하고 손으로 터치하여 사진을 확대한다.




-

영화가 던지는 몇 가지 질문들
1. 무엇이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가.
결국 '인간성'에 대한 논의는 가장 인간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서 부터 시작한다. 말트 하게너의 책에서 Voight-Kampff Test (복제인간과 인간을 구분하는 일련의 테스트)는 감정이입을 측정하여 감정이 없는 복제인간과 감정이입능력을 가진 인간을 구별하는 시험이다. "'눈' 데카르트적 의미로 영혼과 진리의 기관이다진정한 인간과 인조인간을 과학적 조사를 통해서 구분할 있다는 확신을 갖는다. " 라고 하는 믿음마저 없다면 (이는 훗날 의심되지만) 궁극적으로는 현실과 허상의 경계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사회는 가득차게 된다. 
이러한 의심은 또 다양한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1) 이미 일어나고 있으나,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이는 눈이나 육체로 판단할 수 있는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현대 사회의 우리는 기술과 물리적으로 '싸우지' 않으며 - 더욱이 무기를 들고 싸우거나 치고 받으며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다. 눈이 보이지 않은 '폭력'은 폭력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더 열정적으로 우리의 육체를 기술의 세계에 편입시키려 한다. 예를들면 터치의 발전이나, 아이워치(손목), 구글 글라스(눈)으로 분명 디지털 시대에 '육체'의 의미는 더욱 커지게 되었다. 

2) 그러나 현실과 허상의 경계가 무너진다고 하는 것 ; 다른 의미에서는 이데올로기가 무너진다고도 판단할 수 있는 차원의 문제는, 디지털에 대한 (구시대적인) 유토피아적인 찬양이 아닌가? 예를 들면 벤야민이나 로라멀비나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논의들은 이러한 '혁명'에 대한 희망적인 전제를 가지고 있다.

3) 대다수의 SF영화에서 상상하고 있는 기계들이 감정을 키워 인간과 사랑을 나누거나, 심지어는 기계와 기계사이의 '로맨틱'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 그 것이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혼돈시키는 도구로서 이용되고는 하는데, 이 것 역시 기술에 대한 판타지에 불과하다. 기계가 인간의 형상을 하거나, 기계에게 감정을 주는 일은 현재 (2015)년의 기술로는 투자대비 지나치게 비효율적이며, 이는 인간과 구분되었지만 인간과 유사한 형태의 감정을 교류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 인간과 완전히 분리할 수 없는 무언가로 발전할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는 오히려 '공각기동대'에서 제시하고 있는 반기계 반인간이 더 현실적이지 않은가?.. (애초에 미래에 대한 상상에서 현실과 비현실을 따지고 있는 것이 무의미하다.)

4) 복제인간들이 하고있는 고민 자체가 지금 시대의 인간의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더 오래 살고 싶어하고, 진정한 감정과 기억을 원하고 사랑을 욕망하는 고민들은 인간의 것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때문에 이 영화는 관객들로 하여금 주인공인 '블레이드 러너' 보다도 결국엔 한정된 시간만을 살 수 있는 복제인간들에게 더 많은 수준의 동일시를 가능케한다. 영화의 전체적인 음악과 톤은 서정적이고 감성을 자극하는데, 이는 비단 주인공 블레이드 러너와 레이첼 커플만의 감정상황을 묘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로이와 프리스의 사랑 그리고 그들의 죽음을 물씬 자극하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그들의 상황에 더 쉽게 감정 이입하도록 한다. 

2.  영화 전체를 권력관계를 중심으로 다시 해석할 수 있다. 
- 호루스의 눈? 프리메이슨 마크? $를 상징하는 피라미드와 눈 - 대놓고 자본주의 모티프?


- 오프닝의 폭발 이후의 눈-피라미드 시퀸스와 타이렐의 본사가 이집트의 신전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는 시점에서 이미 종교성이 드러나나, 그것이 영화의 본질과 어떻게 연관성이 있는지, 혹은 연관을 지으려고 하는 일련의 과정자체를 부정하고있는 것인지는 모호하다.

철저히 자본주의 하에서 계획된 미래도시의 모습. 예를 들자면 거대한 광고판은 현대의 모습과 다를바가 없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회에서 통용되는 것은 일본어+아시아어 가상으로 구성 된, 말하자면 '오리엔탈리즘'으로 비판받아 마땅한 방식으로 구성된 사회. 이는 80년대에 만연했던 과거의 제국 일본과 아시아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에서 기조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현재의 영화에서는 반대로 아시아를 미래의 불안요소로 그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오히려 현대 사회가 이미 아시아(하지만 더 이상 일본이 아니라 중국을 중심으로)의 권력하에서 재정렬되기 시작했다고 하는 현실의 반증은 아닌가. 2015년의 상황은 아직은 모호하다고 할 수 있지만, 앞으로 4년 뒤, 2019년의 상황도 쉽게 상상할 수는 없다. 우려가 현실이 되었을 경우에 여전히 서구중심적인 (당연히, 서구의 영화는) 영화 제작 환경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다른 미래에 대한 우려를 그려내고 있을 것이다. 혹은 간사한 방식으로 중국 로케이션 촬영을 한다던가, 러시아와 중국과 힘을 합친다던가 하는 서사를 풀어내는데 30년전의 상상 속 권력구조가 어떻게 현실이 되어있는가를 찾아 볼 수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자본주의'라고 하는 큰 틀은 전혀 변화하지 않아서 더 개방이 되거나 자유를 찾았다기 보다도 상류층과 하류층 인간과 노예 일하는 사람들과 일을 시키는 사람들의 경계는 더욱 명확해졌고, 대중들은 여전히 우매한 대중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80년대의 영화이기때문에 가지는 한계점은 젠더관계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나는데, 특히나 전형적으로 아름답고 순종적인 여성상을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플롯 - 다른 말로 이 영화의 로맨스플롯이 가장 고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3. 디지털 영화와 영화 소유
네번째로 영화를 보게 된 후에 다시 에세이 주제로 돌아오게 된다.
나의 네번의 관람은
1) 학교의 스크리닝 - 전혀 집중하지 못했다.
2) 집에서 첫번째로 다시 보게 됨. 플롯을 이해한다.
3) 다시 한번 노트북으로 화면을 캡쳐하면서 본다. 내가 좋아하는 장면,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모티브 등에 유의해서 보게 된다. 
4) 커다란 스크린으로 영화의 리마스터링 버전을 보게 되는 경험. 압도적인 소리와 화면속에 나 자신을 완전히 몰입시킬 수 있다.

이러한 네번의 경험은 제프리가 주장했던 'Once is not enough'의 리서치와 상당부분 유사하다.

영화를 소유한다고 하는 개념은 여전히 모호;
하지만 이전에 알튀세르의 개념인 '호명'을 가지고 영화가 우리를 주체로서 호명시킨다 라고 하는 컨셉은 개개인이 영화를 멈추고 뒤로 돌리고 자를 수 있다고 하는 디지털 환경에서 충분히 제어되거나 분절 될 수 있다. 적어도 그러한 가능성 혹은 경향성이 생겼다고 하는 것 자체가 유의미 하다. 그리고 이 것이 좋다 나쁘다 라고 하는 평가의 문제는 다른 차원으로 미루어 두자. 

좋아하는 영화는 아니지만, 보고 또 볼 수록 슬퍼지는 영화.












2015년 4월 10일 금요일

[일상] 데일리 칼럼 - 나르시시즘




어느 시간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막 잠에서 깨어 밍기적 거리며 하루를 계획하는 시간이 소중하다. 오늘의 나를 깨운 것은 머릿속의 노래나 꿈은 아니었고 소설의 한 구절로 "싫은데서 끝나지 않고 저항했다면" 하는 말이었는데, 거울과 사진 속의 이상적 자아와 끊임없이 동일시하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싫음이 요 근래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분명히 나르시스트로 인간 관계나 자기애적 장애를 겪고 있을 것이다. 모든 순간이 그러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거울을 보다가 위안을 얻게되는 몇몇의 순간들이 그러하다. 나의 "싫음" 은 이상적 자아와의 괴리에서 오는 싫음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답답하게 살고 있으며, 왜 그러한가에 대한 고민에 그 기원이 있는데, 이를 극복한 어제의 생각은 "나는 나로서 존중받길" 이었다. 타인에 의한 존중과 나에 의한 존중을 모두 포함하는 말이 될텐데, 나는 애초에 이러한 방식으로 태어났으며, 사람은 다양한 종류의 사람이 있고, 나는 그렇게 다양한 종류의 사람 중 하나로서 누군가가 보기엔 차갑고 답답하고 울타리가 있다고는 하나 그렇기엔 내 스스로는 정과 사랑이 많고 밝거나 유쾌한 사람이 되는 일을 바라는 것은 약간은 욕심이 아닌가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아마 목적성이 없는 말과 행동을 하는 일이 그 무엇보다도 나에게는 어려운 일이고, 그것이 사람을 유쾌하고 호감인 사람으로 만드는 무엇인가 일텐데, 그 것을 어설프게 따라하느니 나는 그저 나의 길을 담담하게 고수하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생각보다 이러한 사람들은 제법 많아서, 세상 사람들을 몇등분을 하면 내가 속할만한 카테고리가 존재라는데 지금의 나는 그러한 카테고리에 속하지 못하고 다른 카테고리에서 헤엄치다 보니 쉽게 지치고 마는 것이다. 이는 단순하게 사람이 많은 문제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니 때로는 나와 비슷한 사람에 대한 갈증이 있다가도, 아니야 나와 비슷한 사람에게서는 내가 싫어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거나 참 어울리기 힘들고 갑갑한 사람이네 라고 하는 생각이 무심코 들어버리기 때문에 오래 함께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늘 밸런스가 중요하다. 그리고 잉렇게 나의 관계를 정의하고 나의 삶을 기록하고 그러한 나 자신과 나의 생산물에 무한한 애정을 주는 나 스스로는 분명히 나르시스트다.

2015년 4월 9일 목요일

[영화] While We're Young 2014

While We're Young 2014
Noah Baumbach / Ben Stiller / Naomi Watts / Adam Driver / Amanda Seyfried

Noah Baumbach 감독을 알게 된 것은 불과 이주 정도 전, 프랑스 여행을 앞두고, 프랑스 누벨바그 수업의 현대적 리퍼런싱 격인 (혹은 그렇게 설명 받았던 ) Frances Ha (2012)를 보게 된 이후로다. 그 영화는, 정말로 유쾌하고 어쩌면 '데이트 못하는 여자'의 심리를 프랑스틱한 방식으로 - 혹은 프랑스 영화 스러운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는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지을 법한 그 애매모호한 웃음을 떠나지 못하게하는 그런 류의 영화였다. 나는 주인공 Frances에 상당히 영감을 받은 나머지, 여자가 그려내는 데이트 못하는 여자 삼부작 정도를 만들면 어떨까. 뭐 그런 생각에 이르기까지 한 것이다.

아무튼 나는 저 감독의 배경이나 저 영화의 다른 맥락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지만,
영화는 분명히 시네필의 영화였다. 영화 이론과 영화사에 대한 이해 그리고 영화과에서 자주 떠오르는 주요한 고민과 토픽들을 있는 그대로 대사로서 드러내거나 했다.

그래서 While We're Young 이 영화가 그랬다.
내가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는, 최근 행복하다 못해 그 행복함에 완전히 녹아나지 못하는 황금기의 젊은이가 가지는 사치스러운 고민들을 약간은 긁어줄까 했던 것이고, 영화는 제목처럼 젊을 동안에를 그렸다기 보다도 'Success-Oriented' 하지만 'Success'하지 못한 영화계 중년 부부의 이야기였다. 여기서 끌어온 몇가지 리퍼런싱은 이번에는 다큐멘터리 영화 만들기에 있었는데, 에롤모리스나, 에이젠스타인이나, 나오미와츠의 아버지로 나오는 유명한 다큐멘터리 감독의 '진정성'과 '진실/Truth'에 대한 강연이나, 벤 스틸러의 '북극의 나누크'에 대한 언급이나, 여러모로 지난 학기의 다큐멘터리 수업의 주 된 주제 였던 'One has to distort a thing to catch a true sprit'이라는 (이것은 나의 에세이 주제였다.)와 맞물리고 있었다. 하지만, 말하자면 그것은 영화의 곁다리거나 영화를 좋아하거나 공부하는 이들에게 재미를 주기위한 소스같은 정도로 곁들어져있고 핵심은 역시나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중년 부부가 한창 때를 살고 있는 - 한 창 때의 늘 무언가를 만들고 움직이고 도전하고 있는 젊은 부부를 만나 느끼는 감정과 변화에 대한 이야기다. 자신의 동년배들은 모두 아이를 가지고, 아이를 가지는 일이 자신의 모든 세상을 변화한다고 말하고 실제로도 그들의 삶은 아이를 중심으로 변하는 듯했다. 나의 가장 좋은 친구는 더 이상 그 친구가 아니고 (이러한 주제에 대한 - 당연하지만 어쩔 수 없고 막을 수 없는 친구사이의 변화 - 에 대한 고민은 Frances Ha에서도 잘 나타났는데, 사랑보다도 더 미묘한 우정의 변화를 그린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자신과 자신 주변과의 관계에 묘한 마찰/어색함/어울리지 못함 이라는 상황에서 구출해줄만한 신선함을 25세의 젊은 부부에게서 찾은 것이다. 25세의 젊은이들에게서 그들은 자신의 젊은 시절을 돌이켜 보게 되다가도, 변해버린 자신들의 사랑이나 관계, 진전하지 못하는 일에 지치기도하고, 젊은이들과 어울리면서 익히고 배우게된 새로운 태도들에게서 좋은 영감을 받게된다. 이러한 변화를 그려내는 데 있어 2014 - 2010s의 유물인 스마트폰 '아이폰'이라고 하는 도구는 아주 효과적으로 이용되는데, 정말로 10년 후에 의도적이고 동시에 자연적인 기술품의 반영이 이 후 어떻게 받아드려질지 그들을 촬영하는 동시에 이미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른들은 밥먹으러 모여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궁금한 것이 생각나면 검색해버리고, 중요한 회의를 하는 중에 울리는 메시지음은 예전엔 rude했지만 이제는 accepted 된다. 그런데 이 젊은이들은 우리들은 페이스북을 하지 않고, 타자기를 쓰고, 아날로그 음악을 들으며, 궁금한 것은 찾지 말고 그냥 모르는 채로 두자. 라고 말하는 것이다. - 참 젊은이들은 왜 그러는지 모르지만, 나를 포함하여 아날로그는 이 시대의 것이 아니기에 더 cool해 보인다는 착각에 빠지거나, 아니면 실제로도 현대의 물건들은 늘 존재하고 있는 것이며 나를 피곤하게 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여 약간 도피하고 싶다는 생각에 빠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모티콘을 치는 방법, 약어를 쓰는 방법을 알아내어 즐거워하는 부모님이나, 페이스북을 통하여 소통하고 SNS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수업을 기획하는 교수님들은 참 좋아진 세상의 혁신에 더 들떠있어보이지 않나. (그 와중에 어른보다 더 어른같은 표정을 가진 어린아이가 아이폰을 사용하여 전화를 거는 장면은 '그래도 이건 좀 아닌데...'하는 생각을 주기에 충분했다.)
벤스틸러가 '내가 너의 거짓을 다 폭로해주지' 하며 신나하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다. '젊은 다큐멘터리 필름메이커'로서 가장 '진정성넘치는 방식으로 진실을 추구해야할' 바로 너가! 사실은 다 사기를 치고 있었다니, 이런 귀신이 곡할 노릇이 있나, 거짓을 알아낸 벤 스틸러가 흥분해서 파티장에 돌아와 다큐멘터리의 거장 앞에서 이러한 얘기를 했을 때 아무도 그것을 문제삼지 않은 것은, because that is the way it is 였기 때문이다. 벤 스틸러 캐릭터가 믿고있었던 무언가가 -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믿었던 '말하자면 환상 같은 기준이' 그다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장면처럼도 보였다. 하지만 나누크도 그렇지 않던가. 가짜의 이글루와 세트장에서 액터들과 함께 촬영된 다큐멘터리라고해서 다큐가 아니고 진실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분명의 그러한 비밀이 폭로되었을 때 효과는 많이 반감되지만, 하지만 사실은 많은 사람들은 눈에 더 많이 보이는 것 더 많이 이야기 되는 것을 믿고, 비밀이 그다지 흥미롭지 않은 경우에는 알아도 모른척 하거나 그냥 눈감고 넘어가준다. 아니 뉴스에는 사람들은 충격적인 비밀이 폭로되기를 기다리며 그것을 미친듯이 물어뜯고 사냥할 것 같지만,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약간의 비밀 혹은 조작이 더 중요한 것을 말하기 위한 유용한 장치라면 어느정도는 허용된다. 하지만 이 것을 허용한다고 말하는 순간, 약간의 비밀과 약간의 조작은 기준 없이 불어나, 더 중요한 것을 압도해 버릴지 모른다고 하는 위험을 담보하게 된다.
1년후 벤 스틸러는 그는 나쁘지 않고 젊었다고 말하는 것에, 반사적으로 나는, 나는 지금 이 순간 젊지만 저렇게 살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이 다시 한번 나를 긁었다.

2015년 4월 8일 수요일

[책/소설] 환상수첩


환상수첩 , 김승옥, 1962

- 김승옥 : 1941년 생, 이 사람의 직업이 참 마음에 든다. 소설가, 시나리오작가, 영화감독, 대학교수 이 정도면 내가 원하는 것 다 가졌다. 나는 이 사람의 문체, 말투가 정말로 낯간지러울 정도로 좋은데, 친구에게 보여주었더니 '츤데레'라고 했다. 그다지 틀린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인간실격을 좋아했던것 만큼이나 아니 그것보다 훨씬 더 그의 소설이 읽는 맛이 난다. 60년대의 소설가지만, 그리고 참 때때로 마초적이라서 (상남자는 아니고 여자를 - 정말 모르면서 - 물로 보는 것 같은..) 나는 저 시대가 참 좋은데, 조선시대도 포함해서, 나는 가본 적 없는 시대에 대한 이상한 낭만주의가 있는데, 친구들끼리 저런 대화를 하며 저런 분위기에서 웃고 싶은데 도저히 여자의 몸으로는 살만한 곳은 아니구나 그런 생각이 든다. 그나마 지금 2015년을 여자 대학생으로 살고 있어 다행히구나 싶다. 

환상수첩의 몇 구절..

p32
선애가 임신했을지도 모른다고 했을 때 나는 문득 아버지의 주정이 생각나서,
"애가 태어난다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했더니,
"글쎄요. 난 어렸을 때부터 말하자면 여자는 어린애를 낳아야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늘 이런 아이를 낳았으면 하고 생각했지요. 남보다 영리하고 아주 예쁘고 그런 아이를 말이지요. 그렇지만 요 근래엔..."
"...그저 밉상은 아니고...바보 비슷한 아이를 낳았으면 해요."
"왜"
"고뇌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영화나 보고 좋아하고 당구나 치고 만족할 수 있고 야구 구경이나 하며 시간을 보내고도 후회하지 않는 아주 속물로 만들고 싶어요."
"그렇지만 애가 백치가 아닌 이상 그럴 수 있을까?"
"글쎄요, 하여튼 튼튼한 백치나 낳았으면 호호호..."


p46
이미 나는 형기와 나와의 관계를 깨닫고 있었다. 형기를 사랑할 수 있는 것도 반대로 학대할 수 있는 것도 세상에서는 나뿐이었다. 내가 그의 곁에 있는 한 그는 살아갈 것이다.  


p49
어머니가 
"얘는 얼굴이 하야니까 감색 옷을 입으면 참 예쁠거야."
하고 말하자 아우가 계집애처럼 헤헤 웃는 걸 보고, 나는 토끼를 쫓고 있는 나 자신의 재판을 거기서 보는 듯하여, 아우만은 버스칸에서 영감님처럼 앉아 있을 수 있어주어으면 하고 가슴 아프도록 바라고 있었다. 

: 당신의 토끼도 앨리스에 나올법한 그런 토끼인가요? 


p59
날이 갈수록 내 도피의 어리석음이 드러났다. 미워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반항하는 법을 배웠더라면 나의 괴로움은 진작 서울에서 무마될 수 있었을 것이다.

: 내 말이 그말이네요. 하지만 진작에 계산된 도피를 하며 안도감을 얻으며 사는 삶도 있습니다. 


p94
지상에 죄가 있을리 없다. 있는 것은 벌뿐이다. 벌은 무섭지 않다. 무서운 것은 죄다, 라고 떠들며 실상은 벌을 피하기 위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어리석은 나여. 옛의 유물인 죄란 단어에 속아온 아무리 생각해도 가련한 위선자여.


p96
다시 한번 말하고 싶지만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내야 한다는 문제일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더구나 그를 자살로 이끈 고뇌라는게 그처럼 횡설수설하고 유치한 것이라면 아예 세상엔 사람이 하나도 없었으리라. 그는 마지막에 가서 엉뚱하게도 죄와 벌에 관한 얘기를 잠깐 꺼내고 있지만 죄란게 있다고 한들 또 어떠한가? 
불가피하게 죄를 짓게 되면 짓는 것이다. 그러나 죄의 기준이란 게 없어진 지금, 죄의 기준을 비단 죄뿐만 아니라 모든 것의 기준을 일부러 높여서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분명히 환상적인 기준을 만들어 두고 거기에 자신를 맞추려고 애썼던 모양인데 참 바보같은 놈이었다. 

:그래서 당신은 또 한명의 몸뚱아리로 동시에 진심으로 여러 생각을 하는 사람이군요. 그러니 단 하나의 진심같은 것은 세상 만물의 진리가 없는 것 만큼 존재하기 힘든 것이며, 적어도 내 안에는 그것이 하나의 형태로 살아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분명히 토끼같은 것을 찾는 사람입니다. 계속해서 말입니다.  

[영화] 신데렐라 Cinderella (2015)

Cinderella (Kenneth Branagh, USA, 2015) 

영화관에 가서 볼 생각은 없었는데, 마침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와 수다를 떨다보니 우리의 어깨에 얹어진 스트레스를 풀어줄만한 가벼운 영화가 보고 싶었고, 아마도 그 친구는 많은 이들이 보는 영화를 보고 싶었던 것 같았다. Tottenham Court Road의 오데온 영화관을 가는 일도 오랜만의 일이었다. 예전에 다니던 학교 근처에 그 때 함께하던 친구와 함께 있다는 것 만으로도 나는 이미 약간은 향수에 젖어있었다.

신데렐라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일단은 이 영화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
1) 나는 이 영화가 Frozen Fever의 얹어팔기라는 것을 몰랐다. Frozen Fever를 기대하지 않고 갔기 때문에 더 즐거웠고, 더 재미있었다. 엘사가 한번 재채기를 할때마다 화면이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으로 가득했다. 뒷자석의 꼬마가 나 저거 사달라고 엄마에게 떼쓰는 것 마저도 나에게 동심을 일 깨워 줄만한 그런 것이었다.

2) 신데렐라는 ... 주인공이 더 예뻤으면 좋겠네 어쩌네. 내가 보기엔 충분히 예뻤다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 영화는 그저 그랬다. 말하자면 별 두개 반정도를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평을 하기보다도 이 영화가 불러 일으킨 몇 가지 질문/키워드 들이 있다.
- Spectacle : 화려한 장식과 옷, 와이드 스크린과 로우앵글에서 세로로 빛나고 있는 여성 - 변신한 신데렐라' - 는 바람과 사라지다의 비비안리를 떠올리게 했다. 그 만큼 화려하고 'spectacle'한 여성을 어떻게 하면 그려 낼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을 이 영화는 정말로 잘 알고 있다. 궁전의 무도회 장면, 궁전 밖의 정원 장면을 찍어내는 방식은 그야말로 클래식한 스펙타클이었다. 그런데 내가 이 영화가 타겟으로 하고 있는 관객이 아니어서 일까, 왜 나는 더 이상 이러한 방식이 정말로 웅장하고 압도당할만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가. 지난학기 내내 크라카우어의 장식, 의지의 승리의 스펙타클과 헐리우드에서의 재사용 등에 대한 '(영화 읽기가 아닌) 영화 보기'의 경험에 도움이 되지 않는 어설픈 이론들이 나를 방해하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만, 아무튼 나는 심지어는 가장 아름다워야 할 신데렐라의 파란 드레스도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껴지더라. 그나마 계모와 쌍둥이 같은 두 언니들을 꾸며내는 소품과 의상들은 돈을 많이쓴 뮤직비디오 처럼 꽉차보였는데, 신데렐라는 시종일관 로맨틱하고 아름다운 무드를 연출해줄 조명만 금발머리에 반짝이고, 화려한 장면들은 스펙타클로 채워졌지만 스펙타클은 없었다. :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말로 잘 아는데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은 느낌이었다. 아마 이러한 기분에는 의문스러운 몇 가지 선택들 때문 이었을 거다.
- 의문스러운 선택들 Why? 왜 그랬을까. 아마도 잘하면 좋은 각색 어설프면 어설픔으로 끝날만한 것이지만,
why? 어설픈 코미디(변신장면, 코미디 요정) - 정말로 실망스러웠다. 분명히 웃을 수 있을만한 가장 재미있는 장면이었으나, 나는 신데렐라의 변신이 우스꽝스러운 거위와 도마뱀이 꾸역꾸역 변신하고, 요정과 신데렐라가 갑자기 커져버린 호박에 눌려 찌그러지는 장면이 아니라 가장 화려하고 가장 아름답고 나의 환상의 끝판왕을 충족시켜 줄만한 'the fantasy'! 이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 인자한 할머니가 나와서 신데렐라를 완판녀로 만들어 줄만큼 예쁜 아이템으로 아기자기하게 드레스업해주길 원했던것 같다.
what? 그럼 여기서 또 질문하나. 나는 이 영화에서 무엇을 기대했는가? 둘 중 하나다. 끝내주게 좋은 각색 - 약간의 사회적 메시지, 블랙코미디스러움, 세련미 넘치는 화면 OR 동심판타지 충족의 끝판왕, 클래식의 완성, 이것이 디즈니 이데올로기다 다들 부럽지?? 신데렐라 되고싶지?라고 말하는 디즈니 of 디즈니...), 그런데 결국엔 애매~하다. 신데렐라라도 하려먼 적당히 저 정도 이쁘던지, Be Kind Have Courage라고 스스로의 의지와 성격을 다스리지만, 결론은 예쁘고 좋은 부모님에게서 태어나서 왕자님 눈에 나는게 성공이네, 그런데 신데렐라 보면서 너무 바라는 것도 많다. 그냥 보면 될텐데...
why? 그래도 여전히 문제적인  동정심(?)을 일으킬만한 계모 캐릭터 : 행복을 바라는 두딸 있는 재혼녀. 그녀의 연기나 의상이나 심지어는 그녀를 촬영한 방식도 가장 기억에 남는다. 원작의 캐릭터보다는 입체적이나, 정말 좋은 캐릭터가 될 만큼은 입체적이지 못하다. 그래도 이 여자마저 없었다면 참 심심했을 것 같다는 생각.
what..? 무도회 장면 / 왕자와 신데렐라의 거슬리는 Sensual Touch 왜 저러는건가. 12세관람가에서 왕자가 신데렐라의 허리를 잡는 장면을 클로즈업한다던가 춤추는 동안 공주의 애매한 표정을 보여준다던가. 감독이 개인적으로 신데렐라의 성인판 - 막장으로 인생 한방에 핀 신데렐라 (불여시)와 욕망에 불타는 계모 (재혼녀) 라도 찍고 싶다면 그건 자유지만, 이상한 뉘앙스를 은근 풍기는 것 마저 난 '윽 싫어' 였다. 아니면 이것도 내가 obssessed by Hollywood Male Gaze..?이런건가...


결론은 참 애매모호하고, 케이블에서 자주 만날만한 영화였다.

2015년 4월 5일 일요일

[런던생활] Easter Holiday 2015 영국의 부활절

편집자 주: [런던생활] 카테고리에서는 런던의 일상적인 모습들을 소개합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블로그로 사담이 가득합니다. 2012년 처음 런던에서 살기 시작하여 올해로 3년차에 접어든 초보 블로거, 유학생입니다 :D




Easter Holiday 2015 영국의 부활절


영국의 중요한 명절들을 파악하려면 마트로 가면 됩니다. TESCO, M&S, Sainsbury's 로 장을보러 갈때마다 계절 별로 변화하는 데코레이션이 앞으로 어떤 명절이 다가오는지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봄, 일년 중 가장 큰 행사인 크리스마스가 끝난 직후부터 잠깐의 발렌타인 데이와 MOTHER'S DAY (3월)의 기념일들이 지난 후의 마트는 이스터 버니와 에그로 가득하게 됩니다. 

(사진 : 본인 촬영)

영국에서의 이스터는 종교적 휴일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데요. EASTER라는 말의 어원을 앵글로 색슨족의 새벽과 신의 여신 EOSTRE에서 왔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답니다. (출: http://www.learnenglish.de/culture/easter.html) 이스터 일요일의 전 금요일과 다음 월요일은 BANK HOLIDAY로 지정되어 있어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기도 하구요. 이스터 휴가의 런던은 여행객으로 북적이게 됩니다. 휴가기간 동안은 크로스번을 먹거나 이스터 초코를 주고 받으며 즐거운 봄 명절 기운으로 가득합니다. 

MAUNDY THURSDAY : 이스터 직전 목요일로 예수가 최후의 만찬을 했다고 알려진 날입니다. 이날은 여왕님이 공식 세레모니에 참여합니다. 
GOOD FRIDAY : 이스터 직전 금요일로 특별 예배가 열립니다. 이날 크로스번을 먹는 것이라고 하네요. 관광지로서는 최고의 대목입니다. 좋은 공연과 레스토랑은 미리 예약해야만 갈수 있겟네요. 
EASTER SUNDAY : 당일인 일요일에는 예배를 보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거나 하지요. 전통적으로는 이스터가 결혼을 하는 날이었다고도 하네요. 

이렇듯 전통적인 방법으로 이스터휴가를 즐길 수도 있지만, 유학생들에겐 신나는 봄방학으로 근교의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스페인 등등으로 휴가를 떠나기도하고 때로는 마감을 기다리고 있는 과제에 치이거나 5월달 내내 가득한 시험공부를 하며 도서관에서 보내기도 하네요.

올해의 이스터 휴가로는 프랑스 남부로 4박 5일간 휴가를 다녀왔습니다. 정말로 즐거웠던 여행이라 한 동안 잊기 힘들 것 같네요. 작년에는 바르셀로나로 5일을 다녀왔는데, 그때도 정말 좋았어요. 바람불고 날씨가 꾸리꾸리한 런던에만 있다가 햇살을 맞고 오니 여러모로 재충전되는 기분이네요. 그리고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과제와 시험준비로 바쁘게 되겠지만, 그 동안 블로그를 틈틈히 해보는 것이 저의 계획입니다.

모두들 Happy Easter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