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25일 수요일

<시나리오>

#1 
솔직히 얼마나 하게 될런지 자신은 없다. 내일 까먹지 않고 기억해낸다면 그 정도만 되어도 성공이다. 지금 당장 무언가 시작하지 않으면 무료함에 파묻힐 것 같았고 어차피 아껴두어도 의미 없을 것 같아 하루에 하나씩 올려보기로 한다.

#7years 
#Scene1 
#콘크리트 도로

좋은 나이를 맞이한 그녀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기로 했다. 
한적한 도로, 키의 반절정도 오는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그녀는 조금 빨리 걷다가 조금 천천히 걷다 멈추었다 다시 빨리 걷기를 반복한다. 
이어폰을 귀에서 벗자 세상이 시끄러워 졌다. 화려한 간판들도 끼리끼리 모여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어느 것 하나 그녀의 흥미를 끄는 것이 없다. 마침 전화가 울렸지만 그냥 받지 않기로 했다.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분위기에 심취해 여배우처럼) 눈을 잠시 감고 생각에 빠지기로 했지만 그것도 잠시. 화려한 얼굴을 하고 천사같은 미소를 짓는 여자와 부딪혀 잠깐의 사색마저 방해받았다. 

아 역시 되는일이 없구나. "쯧"

그녀는 나지막히 혀를 찼다.

2015년 10월 13일 화요일

Suffragette (2015)

https://youtu.be/SUKjwIaTZ4Y
https://youtu.be/-JYzgPPoQf0
Meryl Streep Interview on Suffragette

"Deeds, not words"

영화의 여운보다도 메릴 스트립의 인터뷰가 심장을 때렸다.

세상은 결국 다양한 문법과 언어의 교합물 이다.
그런데 그 언어는 때로는 수 많은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기도 하고, 태어난 순간부터 이유없는 폭력 아래로 내몰기도 한다.

태어났을 때부터 원래 그래왔다고 여겨지던 이 세상의 구조는 사실은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것이고 그리고 그것을 변화시킬 힘은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다.

이 영화는 그런 의미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가 누리고 있는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사실은 투쟁과 싸움의 결과였음을 말해주었고, 그것이 고작 100년도 되지 않은 역사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내가 집착했던 것이 행동이 아니라 언어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데올로기적인 신화를 수반하는 몇몇 단어들에 대한 일차원적인 거부감이
당연한 현상과 행동을 직면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메릴 스트립이 말하듯 - 무언가 틀린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
그것이 변화의 시작이라고 본다.

그러나 변화는 용기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하나의 행동의 시작은 또 다른 행동을 포기를 궁극적으로 수반한다. 포기해야하는 것들과 얻어야 하는 것들의 가치와 사회가 구성해 놓은 책임을 디디고 서서 안개 낀 길을 선택할 수 있을까.

지난 번 Martian을 보면서도 든 생각이었고, 이 영화에서의 에밀리의 죽음을 통해서도 느끼는 바이지만, 지금의 나에게 세월호 사건과 '절망적이고 희망이 없는' 일련의 사건들은 깊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단 한명의 생존에 세상이 움직이는 서사구조를 보면서 300여명의 학생들과 사람들을 바다 한 가운데에 두고 올 수 밖에 없었던 우리나라와, 그들에 대한 따뜻한 연민은 무관심과 짜증으로 바뀌었고, 생명을 저버리면서 까지 세상의 부조리함에 대항하려 했던 사람들의 '행동'들은 세상의 팍팍함과 이기주의 아래에서 묵살당했다. 지금의 우리나라 사회는 더 이상 행동이 세상을 바꾸지 못할 것이라는 패배주의에 휘감겨있고, 눈에 보이는 부조리는 보이지 않는 척으로 일관하는 것이 당장의 삶에 더 이로울 것이라는 판단에 이르게 한다. 극단이 아니라면 관심없음이 평범한 사람들의 가치가 되고, 평범한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용기 없는 사람들의 쉽지 않은 미덕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세상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여성에 대해 생각한다.
현실적인 어려움이라고 말하는 '말'은 문제에 대한 변화의지가 없다는 말과도 같다.
하지만 무엇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할 필요나 가치는 못 느끼고, 아니 필요나 가치는 실감하지만 내가 나서서할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
나는 지금 어디에 서있는가.

나는 여성 감독이 촬영한 이 영화를 정말로 오래간만에 보면서
미디어가 얼마나 남성중심적인 시선을 (멀비가 말한 그대로!) 관객들에게 강요했는지 깨달았다. 관객에 따라서 이 영화가 다른 영화와 얼마나 다른 시선을 (카메라의 움직임이나 프레임으로) 가지고 있는지 실감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이 영화는 정말로 여성의 영화였다 - 예를 들면 남성과 여성을 촬영하고 있는 level과 앵글의 차이, 일하는 여성이 느끼는 갈등과 감정선의 지점을 표면에 드러내고 그것이 영화를 이루고 있는 주요한 담론으로서 작용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역시나 당연한 것이다.
폭력은 정당하지 않다.
당연한 죽음은 없다.
그렇다면 명예로운 죽음은 있는가?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가치판단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미디어를 비롯하여 대중매체가 사람들의 가치를 보편화 시키고,
많은 사람들이 같은 것을 원하도록 만들면서
경쟁은 더욱 치열해진다. 소수가 누리고 있는 것들은 재분배되지 않는다.

* 글을 어떻게 쓰는가. 말을 어떻게 해야하는가.
나는 최근 몇 가지 중요한 인상과 키워드를 적당하게 버무리는 것으로 '말'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것의 한계를 매일 매일 어설픈 언어 속에서 실감하면서,
이제는 연결되지 않는 모호한 지점을 파고들어서 그것을 아주 명확하고 엄밀하고 깨끗하게 만들어 '말이 되는 말'을 하는 것을 언어 사용의 최대의 목표로 하고 있다.
다른 말로 한다면 나는 이제 알맹이가 있는 언어를 사용할 것이라는 말이 된다.
올해 초 나는 비전과 콘텐츠를 찾았고
여름의 나는 문법을 찾았고
지금의 나는 말을 찾고 싶다.
간극을 채우는 것은 궁극적으로 학문이 된다.
안개꽃으로 공간을 채우지 않겠다.
그것이 내가 삶을 대하는 기존의 태도였다면
나는 차라리 그것을 더 명확한 것들의 나열을 통해 비어야 할 공간을 비워두겠다.

** Vote for Women ;
나는 현실의 문제를 눈감고 있는가
반문하라




2015년 10월 11일 일요일

Right Now Wrong Then

2015 BFI London Film Festival,

Right Now, Wrong Then (2015, Hong Sang-Soo)

Cine Lumiere Screening (11/10/2015)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한번에 이 영화의 제목을 맞게 말할 수 있을까.
홍상수 감독의 그 신작 보았어요? 하면서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혹은 지금은 틀리고 그때는 맞다? 하며 버벅거리는 '시네필'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 감독은 이상한 실소를 뿜었을 것 같다. 참 이상한 사람이다. 그의 카메라에 담긴 것들은 혹은 그가 카메라에 담은 것들은 대부분 위선적이다. 감정을 살려내려는 줌인이 없어도, 캐릭터에 대한 묘사가 없어도, 늘 반복적인 '홍상수'의 플롯 안에서 그는 계속 새로운 것들은 위선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한다.

영화는 크게 두 가지 챕터로 나뉘어져 있다.
그 첫번째와 두번째는 미묘한 지점에서 다르지만 전혀 다른 뉘앙스를 주는데,
그것이 엄밀하게 무엇인지는 사실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내가 읽기에는 첫번째와 두번째가 (물론 완전히 다른 촬영이었겠지만) 같은 평행적 상황에 대한 다른 표현이라고 읽었고 - 그러니까 다른 이야기는 아니라고 판단했고,
대사의 길이나 속도의 차이역시 보는 사람의 심리에 따라서 약간의 오차가 있을 수 있다는 판단하에 나는 그 둘의 '거의 비슷함으로 같다' 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분명하게 다른 것들은, 첫번째 파트는 매우 홍상수다웠다는 것이고 두 번째 파트는 또 다른 홍상수 다웠다는 점이다. 말로 정리하기 매우힘들지만, 1부에서의 남자 캐릭터가 더 익숙했다면 왜일까.

힘들게 상징과 색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고,
외국 관객들과 한국인 관객들이 다른 포인트에서 웃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아마도 홍상수의 영화가 좋은 이유는 역시나 그것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웃음 포인트와 분명 어른들의 인생의 어떠한 낮과 밤을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계속 그의 영화는 기대되고 기대되고

2015년 5월 31일 일요일

Rainbow

Rainbow

무지개 동화

무지개를 보고 동화를 쓰지 않는 것은 무지개를 내려 놓은 하늘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둥근 아치 모양의 끝은 보이지 않았지만, 가장 높은 꼭대기에서 부터 이야기거리를 잔뜩 들고 줄지어 내려오는 '작고도 큰 것들'이 있었다.
이 '작고도 큰 것들'은 말하자면 요정같은 존재라서, 내가 무지개를 볼 수 있는 기숙사 7층에서는 아치 위를 종종걸음으로 걷는 개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동차보다도 큰 제법 묵직한 모양새를 한다.
이 요정같은 것들이 들고오는 이야기거리란 무지개 색처럼 달콤하고 반짝이지는 않지만, 설레임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옮기는 얼굴엔 불안감도 가득하니 내가 얼른 무지개가 사라지기 전에 이야기를 하나 빼내와서 대신 적어내려 가기라도 하는 일이 옳은 일이라 생각했다.
무지개와 무지개 요정과 하늘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



#1
소녀가 태어났을 때 이미 소녀는 혼자였다.
소녀를 돌보아 주는 보모와 수행기사와, 소녀가 가장 사랑하는 폴이 있었기에 소녀는 외로움을 알지 못했다. 싸우거나 귀찮게 굴거나 잔소리하는 부모님이 없으니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고 소녀는 생각했다.
소녀는 자신의 시간을 스스로 사용하는 법을 알았다. 아침에 일어나 가볍게 스트레칭을 20분, 또 씻는데에는 30분 정도, 식당까지 내려가는 데 7분, 식사하는 데 35분, 일어나서 방으로 돌아오는 건 9분정도로 창문이 난 길을 따라 걸어온다. 보모가 추천해주는 옷으로 갈아입는데 12분 그리고 예쁜 구두를 신고 폴과 함께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걸어 대문을 열 때까지 또 20분. 그렇게 시간을 맞추고 나면 소녀는 스스로가 자랑스러워졌다. 쓸데 없이 보내는 시간이 단 한 순간도 없다니! 아마 나는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야! 소녀는 늘 그렇게 생각했다.
대문을 나선 소녀는 갈 곳이 없었다. 소녀는 태어났을 때 부터 늘 소녀였다. 그래서 어디에 가야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소녀는 무료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폴이 기뻐할지 궁리하다가, 점심 메뉴를 보모와 함께 정하고 오늘의 요리를 곰곰히 생각하다.
배우고, 이제는 내일의 계획을 세우면 된다. 소녀는 소녀의 삶이 완벽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 누구도 방해하지 않고, 자유롭고, 외롭지않고 사랑도 있다면 불필요한 것은 필요가 없다.
하지만 소녀는 그 생각을 너무 자주 했다.
자기 자신이 행복하다고, 그 삶이 완벽하다고, 그 누구보다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비가 오는 날에도 소녀는 대문 앞에 앉아 폴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오늘 소녀에겐 두명의 보모와 세명의 수행기사가 있다. 빵을 쥐어주고 다른 대문으로 내모는 소녀의 완벽한 삶이 반복된다.

[2013년 언젠가의 글]


2015년 5월 30일 토요일

논어 - 인문학 특강

"好學"(학문을 좋아함) 에 대하여 

물음이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시간

論語(논어) - 孔子의 어록과 제자들의 문답을 담은 유교 경전

: 논어를 현대의 맥락에서 그리고 일상 속에서 적용 될 지혜로 이해할 것!

子曰:「學而時習之,不亦說乎?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人不知而不慍,不亦君子乎?」

공자가 말하기를: 
"배우고 틈나는대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하겠는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아니하여도 노여워하지 아니하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1 好學 "현실과 이상의 차이를 어떻게 매울 것인가? 인간이라면 '배움'을 통하여 채워나간다."
: 유일신 문화 (유일신이 창조하고 심판하는) 에서라면 '믿음'에서 시작했을 테지만, 
만물신과 조상신을 믿는 동양문화권에서는 '사람'을 중요시하여 '學'으로 논어를 시작한다.
(또한 공자 사상이 나를 살찌우는, 자신을 위한 배움(위기지학), 학문을 좋아하는 태도 (好學)를 중요시 함을 옅볼 수 있는 대목이다.)
: 학문은 왜 중요한가? 
"好仁不好學, 其蔽也愚; 好知不好學, 其蔽也蕩; 好信不好學, 其蔽也賊; 好直不好學, 其蔽也絞; 好勇不好學, 其蔽也亂; 好剛不好學, 其蔽也狂"
"인자하기를 좋아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우둔해지는 것이고, 지혜롭기를 좋아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까불게 되는 것이고, 믿음직스럽기를 좋아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자신을 해치는 것이고, 곧기를 좋아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가혹해지는 것이고, 용맹스럽기를 좋아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난폭해지는 것이고, 굳세기를 좋아하면서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무모해지는 것이다."
"사랑을 앞세우면서 배우려 하지 않으면 어리석은 짓을 하고, 지혜를 앞세우면서 배우려 하지 않으면 제멋대로 굴고, 믿음을 앞세우면서 배우려 하지 않으면 상대를 다그치고, 정직을 앞세우며 배우려 하지 않으면 혼란을 부추기고, 강직함을 앞세우며 배우려 하지 않으면 통제 불능이 되는 것이다." 
: 배움이 현실과 이상의 간극을 어떻게 메울 수 있는가에 대한 통찰이자,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데에 배우지 않아 생기는 어리석음에 대한 통찰. 
: 삶이 고비를 넘는 일이 힘들고 불안하기에 이에 집중하게 되는데 삶을 넓게 보면 삶이란 고비를 넘은 다음이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신정근 교수) 

#2 정치 "近者說遠者來" 근자열원자래
"가까이 있는 사람은 기뻐하고, 멀리 있는 사람은 오게하는 것이다."
이는 비단 나라의 정치와 백성과 관련되어 있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 관계 전반에 걸쳐 적용 될 수 있는 것으로. 사람이란 무릇 가까이 있는 사람은 기뻐하도록 멀리 있는 사람은 절로 와 머무르게 하도록 하였을 때 군자 됨이 아닌가.
: 자신을 갈고 닦아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하고 공경스럽게 대하면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준다. 스스로 적용자가 되고 예외자가 되지 않는 것. <-> 포퓰리즘 ; 대책 없는 텅 빈 말. 
: "도움을 주지만 낭비하지 마라. (필요에 따라 주어라) 힘들게 일을 시키지만 원망을 듣게하지 마라. 욕심이 있어도 탐욕을 부리지 말고, 느긋하지만 교만하지 않고, 위엄을 차리지만 사납지 않은 것을 말한다."
:"사람들이 멀리서도 그 모습을 보고 두려워 한다면 위엄이 있지만 사납지 않은 것이다."(군자는 의관을 정제하여야 한다. 위엄있지만 사납지 않고, 눈빛이 흔들리지 않는다.) 

#3  다른 이를 받아드리는 방법 (관용/용서)
: 나의 평생의 좌우명이자 삶을 사는 지혜로 여기는 역지사지가 이 단어안에 있다. 
: "새 출발을 하려면 도우면 되지 물러나려면 내버려 두라. 과거 때문에 받아드리지 않을 필요가 없다" 사회적 편견과 신분을 떠나 '사람'이라는 공유지대에서 만나다. 나의 공유 지대에 누군가를 불러 오는 일이 결국은 사랑이 아닌가?
: Golden Rule 내가 원하는 것을 다른 이에게 하라. 다른이가 나에게 시키지 않길 바라는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마라. 
But, 극단적 프라이버시/개인주의 (내가 너에게 관심을 끌테니 너도 나에게 관심을 가지지 마라) 혹은 가학증 (너도 맞는 것이 좋다면 나도 맞아도 좋다 - 피해의 거래가 성사) 로 오용, 낙용될 수 있다.
관용 : 나와 다르더라도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받아드릴 수 있다.
갈등의 이유는 자기중심적 사고가 된다. '서'가 이루는 세계는 그것이 인으로 나아가는 방향으로 환대하는 세상 신뢰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공유지대로 타인을 초청한다. 
: 온양공검양 (온화하고, 착하고, 공손하고, 검소하고, 겸양하니까 저절로 그렇게 된다.)
: 욕심은 에너지이자 원동력이 되지만 탐욕은 자신을 파괴한다. 탐욕을 경계한다. (계탐도) 탐을 넘지 못하면 '서'로 나아갈 수 없다. 


참고 : EBS 신정근 교수 인문학 특강 1, 2, 3강 

2015.6.1

2015년 5월 19일 화요일

2015년의 사회를 보고 쓰는 어떤 하나의 의견

2015년의 사회를 보고 쓰는 어떤 하나의 의견
A Perspective towards the Society of the Year 2015

[칼럼]
내가 현대 사회에 가지고 있는 의문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때때로 많은 경우에서 대다수가 이끌어가고 있는 현상이며 이른바 '대세'이다.
이에 '따라서' 편승해야 한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지만, 마냥 그 현상들을 부정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예를 들어, 평소 '말세' 나 '요즘 애들이~' 라는 말들을 내가 다른 세대의 사람도 아닌데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사회부적응의 면모를 보이는 것 아닌가.
어쩌면 지금 나에게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가치들이 이후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고, 그럼에도 절대 불변하는 것이 있으리라고 믿고 있기는 하지만, 이 믿음 역시 현재를 부정하여도 좋다는 핑계거리로는 충분하지 않다.
(예를 들어 애초에 이러한 - 지식인 코스프레 - 말투 역시 시대착오적이지는 않은가 우려하게 된다.)

사회에 적응하고자 하는 필사적인 노력과 사회적으로 교육받고 형성되고 스스로 끊임없이 쌓아온 것들이 심심치 않게 부딪히는 것은 결국 지금의 내가 규정되기 어려운 애매모호한 상태로 지속되도록 만든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불만은 없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대세'의 불편함의 몇 가지이다. (이는 차후 수정/추가 될 수 있다.)
1) 연애 강박 미디어 - 특히 '마녀사냥' 등은 상당히 불편하다. 뒷담화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인상과 여전히 사회 전체에서는 통용되고 있지 못하는 가치들을 표면에서 논쟁함으로서 세대간의 격차 혹은 괴리를 가중하고 있지는 않은가. <-> 전혀 반대로, 지금의 젊은 세대에서 현존하고 있는 그러나 논의되지 못하였던 '현상'을 양지로 끌어오는 시도로 보여질 수도 있다. 따라서 지금으로서는 몇몇 관객들 (나를 비롯한) 에게 충분히 소통되지 못하지만, 미디어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과 관심 - 시청률과 언론보도로 이어지는 - 은 이후의 트렌드를 이끌어가는 선구자적인 역할을 한다.
+ 그런데 결혼장려도 아니고 연애를 장려하는 미디어가 사회적으로 어떠한 기여를 하고 있는지 잘 이해하지 못한다. (이 것은 정말로 개인적인 견해로 -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 혹은 관계는 본능적이고 당연한 부분이기에 이를 부정하고 싶지도 않고 그것이 이 글을 작성하는 목표도 아니다. 또한 관객에게 가장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 있고 지속적으로 관객을 동원할 수 있는 안정적인 콘텐츠라는 것 -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지 보려는 것이다.) 지금 떠오르는 바로는 두 가지정도가 있는 것 같은데. 하나는 미국의 대중매체에서 - 예를 들면 디즈니 - 빈번하게 사용 된 '결혼의 신격화(idealised or mythical)'로, 결혼의 장려는 출산과 인구증대-> 더욱 효율적이고 강력한 사회 구축에 기여할 것이다. 따라서 연애의 장려는 결혼의 장려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두번째로, '썸'열풍은? (이는 기본적으로 결혼을 전제로 하거나 목표로한 인간관계가 아니라 연애의 전초전 정도로 보인다.)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물론 연애 자체에도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부여되어 있다. 이 역시 크게 두 가지로, '이성애자 양성' , '사회적 젠더 구성'이다. 둘다 젠더 이데올로기에 대한 것으로, 대한민국의 매체에서는 아주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몇몇의 동성애 트렌스젠더의 방송인들) 대부분이 이성애를 기본 전제로 한다. 이성애에 대한 장려는 다른 관계를 금기시한다. '사회적 젠더 구성' 이라는 측면에서는, 미디어에서는 빈번하게 여성과 남성의 역할을 구분하고 이를 재현하는데 그것이 연애 / 러브라인에서는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각종 리얼리티 예능과 토크쇼 등에서 여성 게스트와 남성 게스트를 수식하는 말들을 분석한다면 이해될 것이다. 가장 단순하게는 여성과 남성이 좋은 외모를 지닐 수록 사소한 행동에도 많은 호응을 얻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장난과 놀림거리의 대상으로서 주목한다. (그러나 미디어가 부여한 남성과 여성의 이미지라고 하는 것이 지금 시대에는 카테고리화하기 힘들 정도로 분화되어 단순화 시키기에는 한계가 있다. 여성만 하더라도 청순/섹시/국민여동생 남성의 경우 초식/짐승/지적인 등의 수식어가 번갈아가며 트렌드를 교체시키는데 더더욱 많은 예외가 등장한다.) 혹은 몇몇의 연애를 주제로한 프로그램에서 이야기 하듯 '어떻게 하여야 남성/여성이 좋아한다.' '어떻게 하여야 남성/여성에게 매력을 어필할 수 있다.' 하는 등의 가이드라인이 일종의 '연애 이데올로기'를 구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여성이 좋아/싫어하는 남성의 패션 스타일 등은 획일화된 남성상에 기여한다. 특히나 트렌드에 민감한 현대 대한민국 사회의 젊은이들의 경우 이러한 몇몇 목록에 더욱 열광적으로 반응한다.

2) 언어 파괴 - 언어를 특히 글을 사용할 수단이 카톡/이메일 등으로 수렴되어, 이러한 매체의 특성에 적응된 언어의 사용이 가속화 된다. 특별히 글을 쓰는 사람이나 문과를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더욱 그러하다. 이에 대한 우려는, 앞으로도 간소화된 언어가 대세로 자리잡고 더더욱 가속화 될 것이라는 점이다. '언어'가 사람의 사고방식, 세계관, 문화 등을 상당부분 (아니 거의) 결정짓는다고 할 때 간소화된 언어는 더욱 풍부해 질 수 있는 사고(생각)을 제한한다. 예를 들어, '~어떠하다'고 생각되고 지속될 수 있는 이야기들의 가능성들이 '헐, 대박' 이라는 언어에 의하여 단절되어버리는 것이다. 간소화된 언어를 일상생활에서 지속적으로 사용하다 보면 실제로 어떠한 기분이나 생각을 표현하려고 할 때 어떠한 방식으로 해야할지 어려움을 느끼게 되고, 단순한 표현으로 간소화된 감정과 순간들은 이후에 기억되기 어렵거나 반감된다. <-> 따라서 언어/텍스트 외의 대체 수단이 훨씬 더 중요해진다. 예를 들면 사진과 동영상과 같은 시청각적인 언어로서 상황, 기분을 표현하고, 경계없는 '예술' 의 영역; 음악, 춤, 육체, 기술, 그림, 조형 등을 통하여 여전히 사고하거나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언어의 간소화가 사고의 제한으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다양하고 혁신적인 언어표현으로의 발달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려를 표한다. 여전히 삶에서 글자와 언어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상당하다. 특히나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소통하는 가장 주요한 수단이 말이다. 스스로 눈을 감고 생각하는 수단도 언어다. 사람은 언어 밖으로 단 한발짝도 나갈 수 없다는 말이 (심지어는 무의식의 세계에서도) 나는 지금의 사회에서도 여전히 통용된다고 본다. 따라서 대체의 수단이 충분하게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급격한 언어의 파괴는 문제가 된다.
+ 또한 연애의 장려는 다른 사회적 문제에 대한 가장 쉽고 환상적인 개인적 차원의 해결로, 이를 장려함으로서 개개인의 현실적인 문제들, 취업되지 않고 불평등한 사회라고 하는 사실- 을 어느정도 무시하도록 한다. 의식적으로 이를 연애와 로맨스의 획득을 통해 해소하는 것처럼 보이도록한다.(이것이 뮤지컬과 로맨스 내러티브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특징)

3) 포기의 합리화
자기계발이 시대는 지나갔다. 그러니까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아프면 병원가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힘들고 팍팍한 세상에 아픈 것은 당연하고 하며 이를 아름다운 말로 치유해주는 일들이 그다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전세계의 경제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으며, 어디를 가든 취업이 어렵다한다. 일하지 않으면 돈을 벌 수 없고, 돈을 벌지 못하면 살아가기 힘들다. 선택과 집중의 원칙에 따라 포기해야하는 것들이 많이 생긴다.
사실은 사회 전면의 '포기' 트렌드를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하고 싶고, 이해해야한다고 그래서 결국엔 사회전체와 국가차원의 문제에서 그 원인을 찾고 해결해야한다고 말하고는 싶지만, 나는 때때로 아픔을 핑계로 쉬운 포기를 택하는 나약함 역시 사회에 만연하다고 말한다. (이 문장을 쓰는 나 자신이 극도로 보수적이라는 생각에 고민하게 된다. 개개인의 아픔을 완전히 이해하거나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사실에 또 우려하게 된다.) 그래서 김승옥 소설의 하나의 구절을 불러온다. "날이 갈 수록 내 도피의 어리석음이 드러났다. 미워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반항하는 법을 배웠더라면 나의 괴로움은 진작 서울에서 무마될 수 있을 거이다."(환상수첩, 59) 요컨데, 사회의 만연한 도피와 포기의 합리화의 원인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문제 해결능력의 부재에 있다고 순화시켜 말한다.
내가 발견하는 가장 표면적인 현상은 성형 열풍이다. 대한민국은 성형공화국이다. 성형의술 (혹은 기술?)은 극도로 정교하게 발전되어 이제는 티나지 않게 쉽고 간편하게 저렴하게 빨리 자신의 외모를 변화시킬 수 있다. (더 이상 여성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그런데 젊은이들이 자신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가장 적극적이고 진취적이고 희생 (고통과 돈)을 담보로하는 행동이 성형이라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성형을 통하여 가장 빠르게 자신의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다고 하는 믿음과 또 실제로 존재하는 즉각적인 효과들이 더욱 성형을 부추긴다. 예를 들어 작은 시술로 예뻐진 친구가 그 이전에 비해 이성에게 많은 인기를 얻고 다른 분야에서도 긍정적인 결과를 낸다면 주변 사람들은 이를 좋은 '문제해결방안' 이라고 믿는다. - 말하자면, 예쁨/잘생김이 만병통치약! - 성형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도 많이 변화했으며, 자신의 컴플렉스를 극복하고 자신감을 얻는 도구 / 건강상의 수술이 심미적으로도 가능해짐 / 성형산업의 확대로 세계의 중심지로서 기대하는 경제효과  등의 순기능도 물론 무시할 수 없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성형은 자신의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노력과 도구 중 가장 쉽고 나약한 선택이다. 외모지상주의에 스트레스를 받아 외모지상주의를 부추기는 선택을 하고, 외모지상주의의 너머에 있는 자본주의의 굳건함 (돈만 있으면 다 된다고하는) 에 기여하고 결국에는 기득권의 바람대로 사회구조가 형성되는 (마음대로 비약하자면) 이러한 순환구조를 영속시키는 것 아닌가. 성형 열풍에 대해서는 더욱 다차원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또한 이 역시 미디어, 스타시스템, 광고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에 '젊은이의 나약함'이라는 표현으로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음이 사실이다.


쓰다보니 극도로 보수적인 글이 되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말았다. 이런 식의 논리는 사회를 흔드는 데에는 그다지 기여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현재 뿌리내린 사회 전반의 보수화에 나 역시 편승한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마저 든다. 이럴 때 '정치적 보수화' 와 '사고의 진보화'가 표면적으로 충돌하고 있는 젊은이들과 '정치적 진보화'와 '사고의 보수화'가 충돌하고 있는 나, 무언가가 어떤 지점에서 부딪히고 있는지가 명확하지는 않다. 아니 애초에 진보니 보수니 하는 양극의 프레임으로는 설명되어지지 않는다. 더 좋은 글쟁이라면 조금 더 넓게 사회를 볼 수 있을까. 내면의 만연한 불안감이 글에 묻어난다. 더 많은 이들이 나의 글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좋겠다. 평소와 같은 시니컬함으로 무시한다면 좋겠다.

Published 19 MAY 2015





2015년 4월 24일 금요일

문학은 나를 덜 외롭게 한다

실즈는 “자기 자신에게 대꾸”하는 샐린저의 책들에서 재능을 발견하고, 그 재능이 “나를 덜 외롭게 만들고, 삶을 더 살아볼 만한 것으로 만든다”고 고백했다. 마찬가지로 이 책을 읽다 보면 “의식 있는 존재”로서의 작가를 발견하고, 자신의 말더듬 증세를 자신만의 문학론으로 승화시킨 작가와 마주할 수 있다. 그와 마주 보고 있으니 조금 덜 외롭고, 아직 읽어야 할 책이 많이 남아서라도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중심을 지키고 흔들리지 않을 것
계속해서 질문하고 대꾸할 것
어릴 수 밖에없지 아마도 평생
그러니 어림을 싫어하는 것을 그만두고
그래도 어른스럽게 행동해야하겠지만

오늘의 영감
칼부코 화산 폭발


2015년 4월 13일 월요일

[영화] Blade Runner 블레이드 러너 (1982)



(Blade Runner, Ridley Scott, USA, Hong Kong, UK, 1982) 

디지털, 복제, 기술, 고도 발전 등의 키워드와 함께 영화를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 리들리 스콧 감독의 1982년 영화를 수업시간에야 처음 보게 되었다.


스타워즈 뺨치는 '미래 SF영화' 아우라를 풍기는 포스터를 타이틀 이미지로 쓰기에는 포스터가 영화를 충분히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연륜이 느껴지는 포스터를 보니 새삼 1980년대의 상상력이 얼마나 많은 것을 이야기했나 새삼 감탄할 수 밖에 없다.

*간단한 줄거리.
때는 2019년, 다른 행성의 식민지배나 인간이 하기 힘든 각종 일들을 처리하는 용도로 보급된 '복제인간(Replicant)'. 가장 진화된 형태의 Nexus 6는 인간이 느끼는 감정과 고통에 대한 경험을 이식하여 스스로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프로그램 되어있다. 그들을 제어하는 장치는 수명이 4년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 이를 극복하기 위한 복제인간들의 반란이 시작하고, 이들을 잡고 제거(retirement)하는 특수 경찰이 블레이드 러너다.

- 2019년의 현대 도시는, 화려한 지금의 샹하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스카이폴에서 촬영된 상하이를 보니 말이다.) 
- 80년대에 만연한 동아시아에 대한 우려와 공포는 과연 현실이 될까. 현재 진행형이다, 물론 일본이 아니라 중국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으로 가득.
- 인간과 기계를 구분 할수 있는 것이 과거의 감정적인 경험이라고 한다면, 정말로 이를 극복한 기계가 있다면 그것은 왜 인간이 아닌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인간의 '눈'에 대한 믿음.
- 사진을 확대하거나 영상통화공중전화로 전화를 하는 모습, 2015년의 우리는 걸어다니면서 영상통화를 하고 손으로 터치하여 사진을 확대한다.




-

영화가 던지는 몇 가지 질문들
1. 무엇이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가.
결국 '인간성'에 대한 논의는 가장 인간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서 부터 시작한다. 말트 하게너의 책에서 Voight-Kampff Test (복제인간과 인간을 구분하는 일련의 테스트)는 감정이입을 측정하여 감정이 없는 복제인간과 감정이입능력을 가진 인간을 구별하는 시험이다. "'눈' 데카르트적 의미로 영혼과 진리의 기관이다진정한 인간과 인조인간을 과학적 조사를 통해서 구분할 있다는 확신을 갖는다. " 라고 하는 믿음마저 없다면 (이는 훗날 의심되지만) 궁극적으로는 현실과 허상의 경계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사회는 가득차게 된다. 
이러한 의심은 또 다양한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1) 이미 일어나고 있으나,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이는 눈이나 육체로 판단할 수 있는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현대 사회의 우리는 기술과 물리적으로 '싸우지' 않으며 - 더욱이 무기를 들고 싸우거나 치고 받으며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다. 눈이 보이지 않은 '폭력'은 폭력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더 열정적으로 우리의 육체를 기술의 세계에 편입시키려 한다. 예를들면 터치의 발전이나, 아이워치(손목), 구글 글라스(눈)으로 분명 디지털 시대에 '육체'의 의미는 더욱 커지게 되었다. 

2) 그러나 현실과 허상의 경계가 무너진다고 하는 것 ; 다른 의미에서는 이데올로기가 무너진다고도 판단할 수 있는 차원의 문제는, 디지털에 대한 (구시대적인) 유토피아적인 찬양이 아닌가? 예를 들면 벤야민이나 로라멀비나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논의들은 이러한 '혁명'에 대한 희망적인 전제를 가지고 있다.

3) 대다수의 SF영화에서 상상하고 있는 기계들이 감정을 키워 인간과 사랑을 나누거나, 심지어는 기계와 기계사이의 '로맨틱'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 그 것이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혼돈시키는 도구로서 이용되고는 하는데, 이 것 역시 기술에 대한 판타지에 불과하다. 기계가 인간의 형상을 하거나, 기계에게 감정을 주는 일은 현재 (2015)년의 기술로는 투자대비 지나치게 비효율적이며, 이는 인간과 구분되었지만 인간과 유사한 형태의 감정을 교류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 인간과 완전히 분리할 수 없는 무언가로 발전할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는 오히려 '공각기동대'에서 제시하고 있는 반기계 반인간이 더 현실적이지 않은가?.. (애초에 미래에 대한 상상에서 현실과 비현실을 따지고 있는 것이 무의미하다.)

4) 복제인간들이 하고있는 고민 자체가 지금 시대의 인간의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더 오래 살고 싶어하고, 진정한 감정과 기억을 원하고 사랑을 욕망하는 고민들은 인간의 것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때문에 이 영화는 관객들로 하여금 주인공인 '블레이드 러너' 보다도 결국엔 한정된 시간만을 살 수 있는 복제인간들에게 더 많은 수준의 동일시를 가능케한다. 영화의 전체적인 음악과 톤은 서정적이고 감성을 자극하는데, 이는 비단 주인공 블레이드 러너와 레이첼 커플만의 감정상황을 묘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로이와 프리스의 사랑 그리고 그들의 죽음을 물씬 자극하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그들의 상황에 더 쉽게 감정 이입하도록 한다. 

2.  영화 전체를 권력관계를 중심으로 다시 해석할 수 있다. 
- 호루스의 눈? 프리메이슨 마크? $를 상징하는 피라미드와 눈 - 대놓고 자본주의 모티프?


- 오프닝의 폭발 이후의 눈-피라미드 시퀸스와 타이렐의 본사가 이집트의 신전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는 시점에서 이미 종교성이 드러나나, 그것이 영화의 본질과 어떻게 연관성이 있는지, 혹은 연관을 지으려고 하는 일련의 과정자체를 부정하고있는 것인지는 모호하다.

철저히 자본주의 하에서 계획된 미래도시의 모습. 예를 들자면 거대한 광고판은 현대의 모습과 다를바가 없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회에서 통용되는 것은 일본어+아시아어 가상으로 구성 된, 말하자면 '오리엔탈리즘'으로 비판받아 마땅한 방식으로 구성된 사회. 이는 80년대에 만연했던 과거의 제국 일본과 아시아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에서 기조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현재의 영화에서는 반대로 아시아를 미래의 불안요소로 그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오히려 현대 사회가 이미 아시아(하지만 더 이상 일본이 아니라 중국을 중심으로)의 권력하에서 재정렬되기 시작했다고 하는 현실의 반증은 아닌가. 2015년의 상황은 아직은 모호하다고 할 수 있지만, 앞으로 4년 뒤, 2019년의 상황도 쉽게 상상할 수는 없다. 우려가 현실이 되었을 경우에 여전히 서구중심적인 (당연히, 서구의 영화는) 영화 제작 환경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다른 미래에 대한 우려를 그려내고 있을 것이다. 혹은 간사한 방식으로 중국 로케이션 촬영을 한다던가, 러시아와 중국과 힘을 합친다던가 하는 서사를 풀어내는데 30년전의 상상 속 권력구조가 어떻게 현실이 되어있는가를 찾아 볼 수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자본주의'라고 하는 큰 틀은 전혀 변화하지 않아서 더 개방이 되거나 자유를 찾았다기 보다도 상류층과 하류층 인간과 노예 일하는 사람들과 일을 시키는 사람들의 경계는 더욱 명확해졌고, 대중들은 여전히 우매한 대중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80년대의 영화이기때문에 가지는 한계점은 젠더관계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나는데, 특히나 전형적으로 아름답고 순종적인 여성상을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플롯 - 다른 말로 이 영화의 로맨스플롯이 가장 고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3. 디지털 영화와 영화 소유
네번째로 영화를 보게 된 후에 다시 에세이 주제로 돌아오게 된다.
나의 네번의 관람은
1) 학교의 스크리닝 - 전혀 집중하지 못했다.
2) 집에서 첫번째로 다시 보게 됨. 플롯을 이해한다.
3) 다시 한번 노트북으로 화면을 캡쳐하면서 본다. 내가 좋아하는 장면,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모티브 등에 유의해서 보게 된다. 
4) 커다란 스크린으로 영화의 리마스터링 버전을 보게 되는 경험. 압도적인 소리와 화면속에 나 자신을 완전히 몰입시킬 수 있다.

이러한 네번의 경험은 제프리가 주장했던 'Once is not enough'의 리서치와 상당부분 유사하다.

영화를 소유한다고 하는 개념은 여전히 모호;
하지만 이전에 알튀세르의 개념인 '호명'을 가지고 영화가 우리를 주체로서 호명시킨다 라고 하는 컨셉은 개개인이 영화를 멈추고 뒤로 돌리고 자를 수 있다고 하는 디지털 환경에서 충분히 제어되거나 분절 될 수 있다. 적어도 그러한 가능성 혹은 경향성이 생겼다고 하는 것 자체가 유의미 하다. 그리고 이 것이 좋다 나쁘다 라고 하는 평가의 문제는 다른 차원으로 미루어 두자. 

좋아하는 영화는 아니지만, 보고 또 볼 수록 슬퍼지는 영화.












2015년 4월 10일 금요일

[일상] 데일리 칼럼 - 나르시시즘




어느 시간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막 잠에서 깨어 밍기적 거리며 하루를 계획하는 시간이 소중하다. 오늘의 나를 깨운 것은 머릿속의 노래나 꿈은 아니었고 소설의 한 구절로 "싫은데서 끝나지 않고 저항했다면" 하는 말이었는데, 거울과 사진 속의 이상적 자아와 끊임없이 동일시하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싫음이 요 근래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분명히 나르시스트로 인간 관계나 자기애적 장애를 겪고 있을 것이다. 모든 순간이 그러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거울을 보다가 위안을 얻게되는 몇몇의 순간들이 그러하다. 나의 "싫음" 은 이상적 자아와의 괴리에서 오는 싫음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답답하게 살고 있으며, 왜 그러한가에 대한 고민에 그 기원이 있는데, 이를 극복한 어제의 생각은 "나는 나로서 존중받길" 이었다. 타인에 의한 존중과 나에 의한 존중을 모두 포함하는 말이 될텐데, 나는 애초에 이러한 방식으로 태어났으며, 사람은 다양한 종류의 사람이 있고, 나는 그렇게 다양한 종류의 사람 중 하나로서 누군가가 보기엔 차갑고 답답하고 울타리가 있다고는 하나 그렇기엔 내 스스로는 정과 사랑이 많고 밝거나 유쾌한 사람이 되는 일을 바라는 것은 약간은 욕심이 아닌가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아마 목적성이 없는 말과 행동을 하는 일이 그 무엇보다도 나에게는 어려운 일이고, 그것이 사람을 유쾌하고 호감인 사람으로 만드는 무엇인가 일텐데, 그 것을 어설프게 따라하느니 나는 그저 나의 길을 담담하게 고수하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생각보다 이러한 사람들은 제법 많아서, 세상 사람들을 몇등분을 하면 내가 속할만한 카테고리가 존재라는데 지금의 나는 그러한 카테고리에 속하지 못하고 다른 카테고리에서 헤엄치다 보니 쉽게 지치고 마는 것이다. 이는 단순하게 사람이 많은 문제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니 때로는 나와 비슷한 사람에 대한 갈증이 있다가도, 아니야 나와 비슷한 사람에게서는 내가 싫어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거나 참 어울리기 힘들고 갑갑한 사람이네 라고 하는 생각이 무심코 들어버리기 때문에 오래 함께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늘 밸런스가 중요하다. 그리고 잉렇게 나의 관계를 정의하고 나의 삶을 기록하고 그러한 나 자신과 나의 생산물에 무한한 애정을 주는 나 스스로는 분명히 나르시스트다.

2015년 4월 9일 목요일

[영화] While We're Young 2014

While We're Young 2014
Noah Baumbach / Ben Stiller / Naomi Watts / Adam Driver / Amanda Seyfried

Noah Baumbach 감독을 알게 된 것은 불과 이주 정도 전, 프랑스 여행을 앞두고, 프랑스 누벨바그 수업의 현대적 리퍼런싱 격인 (혹은 그렇게 설명 받았던 ) Frances Ha (2012)를 보게 된 이후로다. 그 영화는, 정말로 유쾌하고 어쩌면 '데이트 못하는 여자'의 심리를 프랑스틱한 방식으로 - 혹은 프랑스 영화 스러운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는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지을 법한 그 애매모호한 웃음을 떠나지 못하게하는 그런 류의 영화였다. 나는 주인공 Frances에 상당히 영감을 받은 나머지, 여자가 그려내는 데이트 못하는 여자 삼부작 정도를 만들면 어떨까. 뭐 그런 생각에 이르기까지 한 것이다.

아무튼 나는 저 감독의 배경이나 저 영화의 다른 맥락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지만,
영화는 분명히 시네필의 영화였다. 영화 이론과 영화사에 대한 이해 그리고 영화과에서 자주 떠오르는 주요한 고민과 토픽들을 있는 그대로 대사로서 드러내거나 했다.

그래서 While We're Young 이 영화가 그랬다.
내가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는, 최근 행복하다 못해 그 행복함에 완전히 녹아나지 못하는 황금기의 젊은이가 가지는 사치스러운 고민들을 약간은 긁어줄까 했던 것이고, 영화는 제목처럼 젊을 동안에를 그렸다기 보다도 'Success-Oriented' 하지만 'Success'하지 못한 영화계 중년 부부의 이야기였다. 여기서 끌어온 몇가지 리퍼런싱은 이번에는 다큐멘터리 영화 만들기에 있었는데, 에롤모리스나, 에이젠스타인이나, 나오미와츠의 아버지로 나오는 유명한 다큐멘터리 감독의 '진정성'과 '진실/Truth'에 대한 강연이나, 벤 스틸러의 '북극의 나누크'에 대한 언급이나, 여러모로 지난 학기의 다큐멘터리 수업의 주 된 주제 였던 'One has to distort a thing to catch a true sprit'이라는 (이것은 나의 에세이 주제였다.)와 맞물리고 있었다. 하지만, 말하자면 그것은 영화의 곁다리거나 영화를 좋아하거나 공부하는 이들에게 재미를 주기위한 소스같은 정도로 곁들어져있고 핵심은 역시나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중년 부부가 한창 때를 살고 있는 - 한 창 때의 늘 무언가를 만들고 움직이고 도전하고 있는 젊은 부부를 만나 느끼는 감정과 변화에 대한 이야기다. 자신의 동년배들은 모두 아이를 가지고, 아이를 가지는 일이 자신의 모든 세상을 변화한다고 말하고 실제로도 그들의 삶은 아이를 중심으로 변하는 듯했다. 나의 가장 좋은 친구는 더 이상 그 친구가 아니고 (이러한 주제에 대한 - 당연하지만 어쩔 수 없고 막을 수 없는 친구사이의 변화 - 에 대한 고민은 Frances Ha에서도 잘 나타났는데, 사랑보다도 더 미묘한 우정의 변화를 그린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자신과 자신 주변과의 관계에 묘한 마찰/어색함/어울리지 못함 이라는 상황에서 구출해줄만한 신선함을 25세의 젊은 부부에게서 찾은 것이다. 25세의 젊은이들에게서 그들은 자신의 젊은 시절을 돌이켜 보게 되다가도, 변해버린 자신들의 사랑이나 관계, 진전하지 못하는 일에 지치기도하고, 젊은이들과 어울리면서 익히고 배우게된 새로운 태도들에게서 좋은 영감을 받게된다. 이러한 변화를 그려내는 데 있어 2014 - 2010s의 유물인 스마트폰 '아이폰'이라고 하는 도구는 아주 효과적으로 이용되는데, 정말로 10년 후에 의도적이고 동시에 자연적인 기술품의 반영이 이 후 어떻게 받아드려질지 그들을 촬영하는 동시에 이미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른들은 밥먹으러 모여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궁금한 것이 생각나면 검색해버리고, 중요한 회의를 하는 중에 울리는 메시지음은 예전엔 rude했지만 이제는 accepted 된다. 그런데 이 젊은이들은 우리들은 페이스북을 하지 않고, 타자기를 쓰고, 아날로그 음악을 들으며, 궁금한 것은 찾지 말고 그냥 모르는 채로 두자. 라고 말하는 것이다. - 참 젊은이들은 왜 그러는지 모르지만, 나를 포함하여 아날로그는 이 시대의 것이 아니기에 더 cool해 보인다는 착각에 빠지거나, 아니면 실제로도 현대의 물건들은 늘 존재하고 있는 것이며 나를 피곤하게 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여 약간 도피하고 싶다는 생각에 빠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모티콘을 치는 방법, 약어를 쓰는 방법을 알아내어 즐거워하는 부모님이나, 페이스북을 통하여 소통하고 SNS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수업을 기획하는 교수님들은 참 좋아진 세상의 혁신에 더 들떠있어보이지 않나. (그 와중에 어른보다 더 어른같은 표정을 가진 어린아이가 아이폰을 사용하여 전화를 거는 장면은 '그래도 이건 좀 아닌데...'하는 생각을 주기에 충분했다.)
벤스틸러가 '내가 너의 거짓을 다 폭로해주지' 하며 신나하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다. '젊은 다큐멘터리 필름메이커'로서 가장 '진정성넘치는 방식으로 진실을 추구해야할' 바로 너가! 사실은 다 사기를 치고 있었다니, 이런 귀신이 곡할 노릇이 있나, 거짓을 알아낸 벤 스틸러가 흥분해서 파티장에 돌아와 다큐멘터리의 거장 앞에서 이러한 얘기를 했을 때 아무도 그것을 문제삼지 않은 것은, because that is the way it is 였기 때문이다. 벤 스틸러 캐릭터가 믿고있었던 무언가가 -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믿었던 '말하자면 환상 같은 기준이' 그다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장면처럼도 보였다. 하지만 나누크도 그렇지 않던가. 가짜의 이글루와 세트장에서 액터들과 함께 촬영된 다큐멘터리라고해서 다큐가 아니고 진실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분명의 그러한 비밀이 폭로되었을 때 효과는 많이 반감되지만, 하지만 사실은 많은 사람들은 눈에 더 많이 보이는 것 더 많이 이야기 되는 것을 믿고, 비밀이 그다지 흥미롭지 않은 경우에는 알아도 모른척 하거나 그냥 눈감고 넘어가준다. 아니 뉴스에는 사람들은 충격적인 비밀이 폭로되기를 기다리며 그것을 미친듯이 물어뜯고 사냥할 것 같지만,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약간의 비밀 혹은 조작이 더 중요한 것을 말하기 위한 유용한 장치라면 어느정도는 허용된다. 하지만 이 것을 허용한다고 말하는 순간, 약간의 비밀과 약간의 조작은 기준 없이 불어나, 더 중요한 것을 압도해 버릴지 모른다고 하는 위험을 담보하게 된다.
1년후 벤 스틸러는 그는 나쁘지 않고 젊었다고 말하는 것에, 반사적으로 나는, 나는 지금 이 순간 젊지만 저렇게 살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이 다시 한번 나를 긁었다.

2015년 4월 8일 수요일

[책/소설] 환상수첩


환상수첩 , 김승옥, 1962

- 김승옥 : 1941년 생, 이 사람의 직업이 참 마음에 든다. 소설가, 시나리오작가, 영화감독, 대학교수 이 정도면 내가 원하는 것 다 가졌다. 나는 이 사람의 문체, 말투가 정말로 낯간지러울 정도로 좋은데, 친구에게 보여주었더니 '츤데레'라고 했다. 그다지 틀린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인간실격을 좋아했던것 만큼이나 아니 그것보다 훨씬 더 그의 소설이 읽는 맛이 난다. 60년대의 소설가지만, 그리고 참 때때로 마초적이라서 (상남자는 아니고 여자를 - 정말 모르면서 - 물로 보는 것 같은..) 나는 저 시대가 참 좋은데, 조선시대도 포함해서, 나는 가본 적 없는 시대에 대한 이상한 낭만주의가 있는데, 친구들끼리 저런 대화를 하며 저런 분위기에서 웃고 싶은데 도저히 여자의 몸으로는 살만한 곳은 아니구나 그런 생각이 든다. 그나마 지금 2015년을 여자 대학생으로 살고 있어 다행히구나 싶다. 

환상수첩의 몇 구절..

p32
선애가 임신했을지도 모른다고 했을 때 나는 문득 아버지의 주정이 생각나서,
"애가 태어난다면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했더니,
"글쎄요. 난 어렸을 때부터 말하자면 여자는 어린애를 낳아야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늘 이런 아이를 낳았으면 하고 생각했지요. 남보다 영리하고 아주 예쁘고 그런 아이를 말이지요. 그렇지만 요 근래엔..."
"...그저 밉상은 아니고...바보 비슷한 아이를 낳았으면 해요."
"왜"
"고뇌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영화나 보고 좋아하고 당구나 치고 만족할 수 있고 야구 구경이나 하며 시간을 보내고도 후회하지 않는 아주 속물로 만들고 싶어요."
"그렇지만 애가 백치가 아닌 이상 그럴 수 있을까?"
"글쎄요, 하여튼 튼튼한 백치나 낳았으면 호호호..."


p46
이미 나는 형기와 나와의 관계를 깨닫고 있었다. 형기를 사랑할 수 있는 것도 반대로 학대할 수 있는 것도 세상에서는 나뿐이었다. 내가 그의 곁에 있는 한 그는 살아갈 것이다.  


p49
어머니가 
"얘는 얼굴이 하야니까 감색 옷을 입으면 참 예쁠거야."
하고 말하자 아우가 계집애처럼 헤헤 웃는 걸 보고, 나는 토끼를 쫓고 있는 나 자신의 재판을 거기서 보는 듯하여, 아우만은 버스칸에서 영감님처럼 앉아 있을 수 있어주어으면 하고 가슴 아프도록 바라고 있었다. 

: 당신의 토끼도 앨리스에 나올법한 그런 토끼인가요? 


p59
날이 갈수록 내 도피의 어리석음이 드러났다. 미워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반항하는 법을 배웠더라면 나의 괴로움은 진작 서울에서 무마될 수 있었을 것이다.

: 내 말이 그말이네요. 하지만 진작에 계산된 도피를 하며 안도감을 얻으며 사는 삶도 있습니다. 


p94
지상에 죄가 있을리 없다. 있는 것은 벌뿐이다. 벌은 무섭지 않다. 무서운 것은 죄다, 라고 떠들며 실상은 벌을 피하기 위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어리석은 나여. 옛의 유물인 죄란 단어에 속아온 아무리 생각해도 가련한 위선자여.


p96
다시 한번 말하고 싶지만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내야 한다는 문제일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더구나 그를 자살로 이끈 고뇌라는게 그처럼 횡설수설하고 유치한 것이라면 아예 세상엔 사람이 하나도 없었으리라. 그는 마지막에 가서 엉뚱하게도 죄와 벌에 관한 얘기를 잠깐 꺼내고 있지만 죄란게 있다고 한들 또 어떠한가? 
불가피하게 죄를 짓게 되면 짓는 것이다. 그러나 죄의 기준이란 게 없어진 지금, 죄의 기준을 비단 죄뿐만 아니라 모든 것의 기준을 일부러 높여서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분명히 환상적인 기준을 만들어 두고 거기에 자신를 맞추려고 애썼던 모양인데 참 바보같은 놈이었다. 

:그래서 당신은 또 한명의 몸뚱아리로 동시에 진심으로 여러 생각을 하는 사람이군요. 그러니 단 하나의 진심같은 것은 세상 만물의 진리가 없는 것 만큼 존재하기 힘든 것이며, 적어도 내 안에는 그것이 하나의 형태로 살아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분명히 토끼같은 것을 찾는 사람입니다. 계속해서 말입니다.  

[영화] 신데렐라 Cinderella (2015)

Cinderella (Kenneth Branagh, USA, 2015) 

영화관에 가서 볼 생각은 없었는데, 마침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와 수다를 떨다보니 우리의 어깨에 얹어진 스트레스를 풀어줄만한 가벼운 영화가 보고 싶었고, 아마도 그 친구는 많은 이들이 보는 영화를 보고 싶었던 것 같았다. Tottenham Court Road의 오데온 영화관을 가는 일도 오랜만의 일이었다. 예전에 다니던 학교 근처에 그 때 함께하던 친구와 함께 있다는 것 만으로도 나는 이미 약간은 향수에 젖어있었다.

신데렐라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일단은 이 영화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
1) 나는 이 영화가 Frozen Fever의 얹어팔기라는 것을 몰랐다. Frozen Fever를 기대하지 않고 갔기 때문에 더 즐거웠고, 더 재미있었다. 엘사가 한번 재채기를 할때마다 화면이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으로 가득했다. 뒷자석의 꼬마가 나 저거 사달라고 엄마에게 떼쓰는 것 마저도 나에게 동심을 일 깨워 줄만한 그런 것이었다.

2) 신데렐라는 ... 주인공이 더 예뻤으면 좋겠네 어쩌네. 내가 보기엔 충분히 예뻤다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 영화는 그저 그랬다. 말하자면 별 두개 반정도를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평을 하기보다도 이 영화가 불러 일으킨 몇 가지 질문/키워드 들이 있다.
- Spectacle : 화려한 장식과 옷, 와이드 스크린과 로우앵글에서 세로로 빛나고 있는 여성 - 변신한 신데렐라' - 는 바람과 사라지다의 비비안리를 떠올리게 했다. 그 만큼 화려하고 'spectacle'한 여성을 어떻게 하면 그려 낼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을 이 영화는 정말로 잘 알고 있다. 궁전의 무도회 장면, 궁전 밖의 정원 장면을 찍어내는 방식은 그야말로 클래식한 스펙타클이었다. 그런데 내가 이 영화가 타겟으로 하고 있는 관객이 아니어서 일까, 왜 나는 더 이상 이러한 방식이 정말로 웅장하고 압도당할만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가. 지난학기 내내 크라카우어의 장식, 의지의 승리의 스펙타클과 헐리우드에서의 재사용 등에 대한 '(영화 읽기가 아닌) 영화 보기'의 경험에 도움이 되지 않는 어설픈 이론들이 나를 방해하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만, 아무튼 나는 심지어는 가장 아름다워야 할 신데렐라의 파란 드레스도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껴지더라. 그나마 계모와 쌍둥이 같은 두 언니들을 꾸며내는 소품과 의상들은 돈을 많이쓴 뮤직비디오 처럼 꽉차보였는데, 신데렐라는 시종일관 로맨틱하고 아름다운 무드를 연출해줄 조명만 금발머리에 반짝이고, 화려한 장면들은 스펙타클로 채워졌지만 스펙타클은 없었다. :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말로 잘 아는데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은 느낌이었다. 아마 이러한 기분에는 의문스러운 몇 가지 선택들 때문 이었을 거다.
- 의문스러운 선택들 Why? 왜 그랬을까. 아마도 잘하면 좋은 각색 어설프면 어설픔으로 끝날만한 것이지만,
why? 어설픈 코미디(변신장면, 코미디 요정) - 정말로 실망스러웠다. 분명히 웃을 수 있을만한 가장 재미있는 장면이었으나, 나는 신데렐라의 변신이 우스꽝스러운 거위와 도마뱀이 꾸역꾸역 변신하고, 요정과 신데렐라가 갑자기 커져버린 호박에 눌려 찌그러지는 장면이 아니라 가장 화려하고 가장 아름답고 나의 환상의 끝판왕을 충족시켜 줄만한 'the fantasy'! 이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 인자한 할머니가 나와서 신데렐라를 완판녀로 만들어 줄만큼 예쁜 아이템으로 아기자기하게 드레스업해주길 원했던것 같다.
what? 그럼 여기서 또 질문하나. 나는 이 영화에서 무엇을 기대했는가? 둘 중 하나다. 끝내주게 좋은 각색 - 약간의 사회적 메시지, 블랙코미디스러움, 세련미 넘치는 화면 OR 동심판타지 충족의 끝판왕, 클래식의 완성, 이것이 디즈니 이데올로기다 다들 부럽지?? 신데렐라 되고싶지?라고 말하는 디즈니 of 디즈니...), 그런데 결국엔 애매~하다. 신데렐라라도 하려먼 적당히 저 정도 이쁘던지, Be Kind Have Courage라고 스스로의 의지와 성격을 다스리지만, 결론은 예쁘고 좋은 부모님에게서 태어나서 왕자님 눈에 나는게 성공이네, 그런데 신데렐라 보면서 너무 바라는 것도 많다. 그냥 보면 될텐데...
why? 그래도 여전히 문제적인  동정심(?)을 일으킬만한 계모 캐릭터 : 행복을 바라는 두딸 있는 재혼녀. 그녀의 연기나 의상이나 심지어는 그녀를 촬영한 방식도 가장 기억에 남는다. 원작의 캐릭터보다는 입체적이나, 정말 좋은 캐릭터가 될 만큼은 입체적이지 못하다. 그래도 이 여자마저 없었다면 참 심심했을 것 같다는 생각.
what..? 무도회 장면 / 왕자와 신데렐라의 거슬리는 Sensual Touch 왜 저러는건가. 12세관람가에서 왕자가 신데렐라의 허리를 잡는 장면을 클로즈업한다던가 춤추는 동안 공주의 애매한 표정을 보여준다던가. 감독이 개인적으로 신데렐라의 성인판 - 막장으로 인생 한방에 핀 신데렐라 (불여시)와 욕망에 불타는 계모 (재혼녀) 라도 찍고 싶다면 그건 자유지만, 이상한 뉘앙스를 은근 풍기는 것 마저 난 '윽 싫어' 였다. 아니면 이것도 내가 obssessed by Hollywood Male Gaze..?이런건가...


결론은 참 애매모호하고, 케이블에서 자주 만날만한 영화였다.

2015년 4월 5일 일요일

[런던생활] Easter Holiday 2015 영국의 부활절

편집자 주: [런던생활] 카테고리에서는 런던의 일상적인 모습들을 소개합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블로그로 사담이 가득합니다. 2012년 처음 런던에서 살기 시작하여 올해로 3년차에 접어든 초보 블로거, 유학생입니다 :D




Easter Holiday 2015 영국의 부활절


영국의 중요한 명절들을 파악하려면 마트로 가면 됩니다. TESCO, M&S, Sainsbury's 로 장을보러 갈때마다 계절 별로 변화하는 데코레이션이 앞으로 어떤 명절이 다가오는지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봄, 일년 중 가장 큰 행사인 크리스마스가 끝난 직후부터 잠깐의 발렌타인 데이와 MOTHER'S DAY (3월)의 기념일들이 지난 후의 마트는 이스터 버니와 에그로 가득하게 됩니다. 

(사진 : 본인 촬영)

영국에서의 이스터는 종교적 휴일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데요. EASTER라는 말의 어원을 앵글로 색슨족의 새벽과 신의 여신 EOSTRE에서 왔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답니다. (출: http://www.learnenglish.de/culture/easter.html) 이스터 일요일의 전 금요일과 다음 월요일은 BANK HOLIDAY로 지정되어 있어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기도 하구요. 이스터 휴가의 런던은 여행객으로 북적이게 됩니다. 휴가기간 동안은 크로스번을 먹거나 이스터 초코를 주고 받으며 즐거운 봄 명절 기운으로 가득합니다. 

MAUNDY THURSDAY : 이스터 직전 목요일로 예수가 최후의 만찬을 했다고 알려진 날입니다. 이날은 여왕님이 공식 세레모니에 참여합니다. 
GOOD FRIDAY : 이스터 직전 금요일로 특별 예배가 열립니다. 이날 크로스번을 먹는 것이라고 하네요. 관광지로서는 최고의 대목입니다. 좋은 공연과 레스토랑은 미리 예약해야만 갈수 있겟네요. 
EASTER SUNDAY : 당일인 일요일에는 예배를 보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거나 하지요. 전통적으로는 이스터가 결혼을 하는 날이었다고도 하네요. 

이렇듯 전통적인 방법으로 이스터휴가를 즐길 수도 있지만, 유학생들에겐 신나는 봄방학으로 근교의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스페인 등등으로 휴가를 떠나기도하고 때로는 마감을 기다리고 있는 과제에 치이거나 5월달 내내 가득한 시험공부를 하며 도서관에서 보내기도 하네요.

올해의 이스터 휴가로는 프랑스 남부로 4박 5일간 휴가를 다녀왔습니다. 정말로 즐거웠던 여행이라 한 동안 잊기 힘들 것 같네요. 작년에는 바르셀로나로 5일을 다녀왔는데, 그때도 정말 좋았어요. 바람불고 날씨가 꾸리꾸리한 런던에만 있다가 햇살을 맞고 오니 여러모로 재충전되는 기분이네요. 그리고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과제와 시험준비로 바쁘게 되겠지만, 그 동안 블로그를 틈틈히 해보는 것이 저의 계획입니다.

모두들 Happy Easter :D 






2015년 2월 10일 화요일

[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 Hiroshima mon amour

*Personal Review written in Korean

나의 다섯번째 누벨바그 영화이며, 아마도 두번째의 일본에 관한 프랑스 영화. (첫번째는 Chris Marker의 San Soleil (Sunless) 였다.)
그리고 기억과 시간, 트라우마와 역사에 대한 영화.
이번 모듈에서 가장 어려운 영화라고 했지만, 지난번 크리스 마커 영화의 충격(혹은 너무 강렬한 인상) 덕분에 이 영화는 비교적 이해를 시도해 볼 수 있는 영화라는 인상을 준다.
역시나 그 둘은 LEFT BANK로 인연이 깊다. 사실은 이 두 영화를 비교하는 일도 가능 할 것이다. 공유하는 것이 많은 만큼 차이점도 분명하다. 하지만 내 생애 하고 싶은 일은 아니다. 아니면 내가 영화를 언젠가 죽기 살기로 분석해보고 싶을 즈음에 도전해 볼만한 일이다.

아무튼간에,

Lui: You saw nothing in Hiroshima, nothing
Elle : I saw everything


강렬한 장면 - images of first atomic victim shifts to 'graphically continuous' image of lovemaking or two lovers, shoulders, arms, hands and back of 'lovers' bodies' - 


이 영화는 분명 사랑을 나누는 둘의 정사장면으로 시작한다. 재로 뒤덮힌 원자폭탄 피해자의 모습은 재가 씻겨나간 후 현재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뒤섞인 몸의 모습으로 전환되고, 그 것은 이 영화가 '히로시마 핵폭탄' 혹은 '전쟁' 이라고 하는 역사의 트라우마를 '사랑' 혹은 '두 사람의 관계'를 통해서 풀어내고자 하는 시도를 나타낸다고도 해석 할 수 있다. 

또 다르게는, '히로시마 원자폭탄' 이라고 하는 도저히 설명하기 힘든 트라우마를 통해서 여성 캐릭터(Elle/그녀)의 개인의 트라우마 혹은 익명의 그녀로 대변되는 프랑스 여성이 공유하고 있는 말해지지 못했던 트라우마 'Femme Tondue (Shoven Women; 적군(독일군)과 친밀한 관계에 있던 여성은 이후 대중들 앞에서 강제로 삭발당함을 통해 모욕당하고 가족들에 의해 갇혀지거나 숨어서 지내야 했다.) 를 이야기 함일 수 있다.

이 영화에 대한 완벽하게 명확한 해석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기에, 'Conflicting' 이라고 하는 혹은 'Dialectic' 이라고 하는 큰 범주에서 볼 때 A를 통해서 B를 말하거나, 각각의 의미를 가진 A와 B를 통해서 C를 말하는 것 (Eisenstein, Montage) 모두 적용 가능하다. 

내가 의도적으로 빨간 일장기가 배경에 있는 포스터를 피하기 위해서 이미지를 찾다가 발견한 일본의 '히로시마 내 사랑' 광고 포스터는 상당히 인상적이다. 이십사시간의정사. 이 문구와 함께 나열된 이미지들은 이 영화가 '히로시마' 보다는 '내 사랑'에 더 가까운 사랑영화 인 것 처럼 말해주고 있지 않나. 그래도 중간열 양 옆으로 'Nevers'와 '히로시마'의 장면을 그리고 X방향으로 사랑하는 혹은 사랑을 나누는 둘의 모습을 배치한 것은 아무렴 이 영화가 '도시와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하는 듯 하다. 

광고 포스터가 주는 두 가지 인상은 1) 참 자극적인 마켓팅이다. 하지만 '저런 방법' 마저 없다면 누가 영화를 볼까. 일본의 포스터를 제외하고도 관객의 시선을 끌기 위해 그 둘의 취한 포즈와 표정은 헐리우드의 멜로드라마와 닮아있다...와
2)영화 대사(Script, text)의 중요성이다. 사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후자다. Nouveau Roman의 대표적 작가 Marguerite Duras가 적어낸 글 없이 이미지들은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영화에서는 이는 'Sound'의 중요성으로 대치된다. 여자와 남자의 Narration이 이미지에 부여하는 압도적인 힘이, 아니 오히려 반대일 수도 있겠다, Duras의 글에 부여된 이미지 일 수도 있다. 그만큼 Marguerite Duras의 Hiroshima mon amour가 중요해진다. Sound 가 Added Value임을 강조한 Michel Chion은 Chris Marker의 Letters from Siberia에 대해서는 코멘트 했으나, Hiroshima mon amour는 Michel에게 전할 수 있는 괜찮은 반론이 되지 않을까. 
(Cinema and Spectatorship 수업이 순간적으로 떠올랐을 뿐이다.)

아직 영화의 첫 장면과 포스터에 관해서 밖에 얘기하지 않았는데 지쳤다.







2015년 1월 31일 토요일

[영화] Birdman

This is what i may call inspiration:-)
Full of useless 'review-ish' vocabs are attached to this piece of work - a depressing heroic comedy - and f***ing

If , i had to watch this film to write an essay or proper review; i'd probably pick up things like :
Long - take
Hero
Stardom
Hollywood and Broadway
Family
Camera movement and
Use/establishment of (amazing!) Temporal-Spartial relationships
Reality
Truth or Dare
Satire? Or Black Comedy
Genre and Theme


But afterall, I loved it, depressing- well was it? I was lost in depression, i knew that this film is talking about something super 'depressing' subject however, did the film let you actually feel that way? Perhaps, the 'limited perspective' which camera had lead us was simply much more than - gaze / look - stuff!! Oh yes, it's a Hollywood film , how/ever/what/ever


And now i'm watching Rope1948
A few 'shots' will lead us and overwhelm our minds 
And anyway it will lead us to Laura!
Neverending cinemaaaaaaaa

2015년 1월 25일 일요일

[영화] 액트오브킬링 ACT OF KILLING

The Act of Killing , 2013, Joshua Oppenheimer

이런 영화를 봤다.
위의 장면을 캡쳐한 이유는, 영화 내내 떠올랐던 Werner Herzog를 화면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폭포수가 떨어지는 곳에서 피해자들이 가해자인 안와르에게 메달을 건네면서 우리를 죽여 천국에 가게해주어 감사하다고 말하는 장면이 그랬고, 중간중간 의도된 인터뷰 장면들 - 의자를 가운데에 사물을 주변부에 색상과 분위기가 어우러지도록 배치한 장면들 - 이 그랬다.

(The Act of Killing)

(Grizzly Man, Herzog)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장면이라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액트오브킬링의 인터뷰장면을 보면서 계속해서 Herzog의 인터뷰장면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는 이 영화의 핵심이 아니다.
영화의 가장 중요한 것의 근처에 다가가지도 못하는 아주 주변부의 사소한 것을
영화를 공부했다는 이유만으로 보란 듯이 찾아내 보이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의 공부와 발견에 대한 기록을 블로그에 해보고 싶기 때문에
저 한 장면이 나를 블로그에 글을 쓰게한 동기가 된다.
그래서 나에겐 의미가 있다.


일단 영화에 대한 몇가지 생각들
1. '가해자'의 역사. 그리고 '영웅'의 역사
나는 며칠전 수업에서 보게된 장군의 아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는 Gangster지만 '장군의 아들'아닌가, 일본놈과 맞서 싸운다.
장군의 아들 김두환 역시 역사 속에서 사람들을 위해 일본놈과 맞서 싸운다는 이유로
그의 폭력이나 위협이 정당화 되었고, 심지어는 멋진 영웅으로서 캐릭터화 된다.

물론 이 영화의 역사적 사건도 그렇고 인도네시아의 현재 상황의 성격은 매우 다르다.
그들은(폭력배 - 판차실라 청년회, 프레만) 공산당을 대학살한 대가를 치룬 적이 없다. 아직도 권력을 쥐고 있으며 사람들을 위협하지만 정부의 입장에서는 대학살을 - 숙청이라 부르고 일견 정당하고 합당하다고 말한다. 그들이 한 일이 나쁜짓이 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처벌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들을 직접 고문하고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을 강간하고 집을 불태우고, 그들의 가혹행위를 당당하게 말하는 것은, 그들이 악몽에 시달리고 술과 마약으로 '살생'의 기억을 잊으려는 노력과 그만큼 더 강한 '종교적 수준'의 이념이라는 이름의 힘이 그들의 일들을 정당하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그들이 했던 일이 얼마나 잔인하고 비인간적이고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들은 공산주의자이기때문에, 숙청하고 사라져야할 대상이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이 당연해진다. 

이 영화가 특별해지는 것은 이러한 사건을 피해자의 입장에서 다루지 않고 가해자의 입장에서 다룬다는 점이다. 이 영화의 입장은 분명하게도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누고 있고, 그 말에는 '나쁨'과 '좋음'의 경계를 그려내고 있다는 말이 내포되어있다. 아직까지도 권력을 지닌 가해자와, 가해자가 말하는 가혹행위 - 사실은 이질적인 장면들이 넘치는 이 영화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하는 의문을 지울 수가 없다.

2. Sympathetic 
그래서 이 영화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명한 대신에, 주인공 Anwar에 대한 인간적인 sympathy 역시 담아낸다. 사실 동정이라고 말하기는 뭐하고, 비인간적인 일을 일삼은 Anwar를 인간으로 그렸다고는 말할 수 있겠다. 특히나 마지막에 구역질을 하는 모습으로 영화를 마무리한다는 점이 그렇다. 사실은 영화의 전체적인 톤에 깔려있는 이 Sympathy에서 나는 Herzog를 발견했는지는 모르겠다. (다시 말하지만 이는 중요하지 않다..)

가해자들에게 대학살을 재연해보라?

영화는 주로 이러한 문구로서 홍보되었는데,
내가 저 문구를 만나기 전에 영화를 보게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저 문장에서, 난감해하는 가해자의 얼굴이 그려지지만,
영화에서는 웃고 있는, 아이들 앞에서도 대학살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이들을 만나게된다.
물론 난감해하는 장면들도 종종 등장한다. 중국인이었던 아버지가 대학살에서 쥐도새도 모르게 죽고 시체로 돌아온 이의 이야기를 눈앞에서 듣는 것, 그리고 자신이 죽였던 바로 그 방법으로 고문당하고 죽는 장면을 촬영하는 것. 재연만으로도 휘감는 공포. 그 공포가 그들이 했던 일에 대한 대가라고 한다면, 여전히 충분하지 않다.

3. Act of Killing
그러니까, 이렇게 난감하고 난해한 상황을 던져준 것 만으로도 생각할 거리가 불어나지만,
결국엔 The Act of Killing 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비단 비교적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학 '학살'뿐만 아니라
전쟁, 범죄살인 그리고 자살까지도.

자연재해에 의한 죽음이나, 병으로 인한 죽음과는 성격이 다르다.

그런데 사람이나 사회에 의한 죽음들은 사실은 다 비슷하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영화 마지막에 Anwar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들었다. 이 것이 정말로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영화였다면 그렇게라도 끝내야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는 각종 범죄자들이 많지만, 모든 살인행위가 범죄가 아니라는 것이..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도 어떤 순간에 나라의 부름에 따라서 살인행위에 가담할 수 있다는 것이. 혹은 나 역시 그렇게 될 가능성이 늘 존재해왔다는 것. 에대해 생각해본다.
특히나 모두가 군대에 가야하는 현재 전쟁 - 휴전이지만 - 중인 나라라면 더욱 그렇다.

그리고 또 이런생각이 든다.
나의 세대의 가장 큰 공포는 무엇인가.
과거의 할아버지 할머니의 세대는 일제강점기 - 식민지 시대와 한국전쟁을 겪었고, 그리고부모님 세대는 독재정권 밑에서 데모하고 싸웠다. 말하자면 우리 바로 직전 세대까지만 하더라도 늘 이러한 고문과 고통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눈앞에서 겪었던 세대다.
나의 기억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책에서나 배웠으며, 간절하게도 내가 살면서 겪지 않았으면 하는 일이다. 하지만 늘 직감적으로, 우리 세대도 언젠가 전쟁을 겪게 될 것만 같다. 어떠한 방식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그리고 실제로도, 지금 IS의 일련의 일들이나, 프랑스의 테러나, 시리아의 일이나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영화 속 인도네시아도 마찬가지고, 가까운 북한도 그렇다. 중국의 큰 땅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사실 알 수 없다.
그럼 말을 바꿔야 한다. 나의 세대의 공포가 아니라.
나, 에게 공포는 무엇인가.
아직까지는 고문과 살인의 공포를 경험한 적이 없다.
세계 2차대전의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일제식민지시대와 한국전쟁 자료들을 보면서 독재체제 하의 학생들을 보면서 단지 상상하고 마음아파할 뿐이다.
우리 세대의 시위는 비교적 평화로운 촛불시위였으며, 우리 세대의 아픔은 총과 칼보다는 현실의 차가운 벽 때문이 아니었나. IMF이후 겪은 경제위기에서 어제의 동료에게 정리해고당하고, 돈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라는 말 아래서 벌어진 '차가운 사건들'. 
작년의 사건 사고는, 사건 사고들 자체도 충격적이었지만, 이어진 더 차가운 시선들, 본질에는 관심 없고 유흥과 놀림거리로 전락해버린 사람 목숨이. 그것이 더 두려웠다.
몇몇 사람들이 놀림감으로 삼아버린 사람의 목숨이. 더 많은 사람들을 꽁꽁 닫히게 했을 것.
말로 물어 뜯고 상처주고 비교하고 경쟁하고 남 위에 서기 위해 노력하는. 그것이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일본이라는, 공산주의라는, 독재정권이라고 하는 그런 벽이 아니라. 내 옆의 사람들이 나의 인생이 벽이 되어버렸나. 아니 그런데 그만큼 차가운 사회는 아닌 것 같다. 적어도 아직은 아닌 것 같다. 따스함이 넘치는 그런 사회를 추구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 아직은 살만 한 곳 아닌가. 
그래서 나에게 늘 가장 큰 공포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다. 깜깜한 미래가 가장 두렵다.
그런데 '나'는 또 그런 사람은 아니다. 늘 계획한 미래가 그 나름대로 착착 진행된다.
그래서 나는 예측할 수 없는 미래가 두렵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살아갈만 할 것 같다.

결국 영화보다는 두서없는 생각으로 마무리 한다. 










2015년 1월 14일 수요일

[갤러리/그림] Late Turner Exhibition

 The Parting of Hero and Leander 1837

아비도스(Abydos, 현재의 사나칼레)에 살던 청년 레안드로스는 유럽의 세스토스 (Sestos)에서 아프로디테의 사제인 헤로를 사랑하게 되었다. 두 도시는 헬로스폰토스(현재의 다르다넬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레안드로스는 매일밤 헤로가 높은 탑에 밝혀둔 횃불에 의지하여 수영으로 해협을 건너갔다. 하지만 폭풍이 일던 어느 날 밤, 횃불이 꺼지고 레안드로스는 파도에 휩쓸려 실종되었다. 헤로는 연인의 시체를 해변에서 발견하고 절망에 빠져 탑에서 몸을 던졌다. 
(네이버 블로그 출)

The Blue Rigi, Sunr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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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트 모던은 좋아한다고 말해도 될만큼 여러번 갔지만 테이트 브리튼은 처음이었다. 감사하게도 얻은 평일의 휴일 느즈막히 일어나서 갤러리에 갈 수 있다는 사실도 좋았다. 지금은 비록 비가 와서 코스타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지만, 역시 나오길 잘했다.

테이트브리튼은 꼭 다시 한번 아니 여러번 가서 찬찬히 보고싶다. 얼핏 봤는데도 눈길을 사로잡는 작품들이 여럿이었다.

물론 오늘의 목적은 터너의 전시였다. 
테이트 브리튼은 터너의 전시를 꾸준히 해왔는데 나는 본적이 없었다. 얼마전에 터너에 대한 영화도 나왔고, 영국이 가장 자랑스러워하고 사랑하는 화가가 아닐까?
얼핏 떠오르는 이미지는 몽환적으로 번져진 빛과 아른아른한 파스텔톤의 색감 바다, 파도, 절벽진 산, 완만한 곡선, 태양, 안개 대부분 풍경이 주는 아른감...?
오늘 전시는 그의 60대70대에 그린 후기 그림이다. 삶의 노하우가 그대로 축적되기도 하였고 나이가 들었어도 건재했다. 사실은 그래서 후기작품의 작품상의 특징보다도 약간은 통통한 영국의 런던출신 할아버지가 자신의 노후를 어떻게 보내는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갤러리에는 유독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았고 구 당시에 1800년대에 그림을 그리던 터너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돌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만큼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의 경험이나 현재 상황 같은 것이 어떻게 그림감상 환경에 영향을 줄 수 있을까 생각한다. 터너의 색감이나 분위기가 좋았지만 이 전시는 우리나라에서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영국의 자랑이기 때문에 그들의 자부심이 느껴지는 전시가 외딴 곳에서 통할 수 있을까. 약간은 overly priced되었다는 느낌도 들었다. 작은 스케치 특히 여행과 바다 스케치가 많았지만, 굉장한 그림들도 많았다. 제일 먼저는 The hero of a hundred fights 1800-10 텍스쳐나 색감이나 굉장히 강렬해서 다른 터너의 그림과는 느낌이 달랐다. 그래서 그런지 옆에 놓여진 터너의 Death Mask를 보면서 이 사람은 생전 어떤 사람이었나 궁금해지게 된다. 풍채는 글쎄, 웃음 많은 아저씨였을 것 같은데 때로 굳어지는 표정은 자신만의 세계 넘어로 분명히 무언가 어두운 부분이 있을 것만 같아. 대부분의 blurry 한 그림들은 따뜻하고 축축한 차갑고도 가벼운 참 영국다운 느낌을 주는데 아무튼 그게 무엇일까 곰곰히 생각을 해보다가 The Blue Rigi,Sunrise (스위스의 리기산/그는 노후에만 다섯번 스위스를 갔다) 를 만났을때. 그래 이 사람은
그 그림 자체에서 아우라를 뿜어낸다기 보다도 이 사람이 보는 세상이 그리고 그가 그려낸 그림들이 음..다시말해서 그가 아우라를 그려냈가는 인상을 받았다. 크지 않지만 투명하고도 마냥 차갑지만은 않은 파란 색감이 정말로 빛나고 있었다. 가장 좋아하는 파란색이었고 테이트 모던에서 이제는 사라진 바닷속의꿈 보다도 더 몽환적이며, 가장 좋아하는 수족관의 색감이었다. 터너의 그림은 대체로 하나하나 보는 것보다는 멀리서 한번에 볼때 더 강한 인상을 주는 것 같다. 계속해서 보게되고 또 보고싶은 contemplation? 맞다면 맞다. 그래서 전시가 한정이라는 것도 좀 아쉬웠고. 그런데 이상하게  The Parting of Hero and Leander 이그림이 제일 좋다고 생각했는데 다 보고 다시 보러 돌아왔을 땐 아니었다. 그림 인상이 이렇게 빠르게 변한적도 처음인 것 같다. 처음보는 최고의 파도표현과 바다와 신화속 에피소드를 루벤스보다도 멋지게 그려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와서 보니 파도도 하늘고 약간 평범했다. 폭풍치는 날은 터너가 전문이긴 할텐데. 


Blue Rigi는 엽서를 하나 샀는데 많이 아쉽다. 늘 그렇다. paul klee도 심지어는 리히텐슈타인도 여전히 printing은 정말 아주 조금도 따라가지 못한다. 모작은 모르겠지만 기술의 발전을 통해 이루어낸 그림 복제는 아직 의미가 덜하다. 그러니까.....내가 지금 배운 이론적 틀이 몇개가 없으니계속 그것을 들이대고 마는 것이 좀 아쉽다. 전체적으로 좋은 전시였으나, 약간은 아쉬운감이 있는, 테이트 브리튼은 꼭 가봐야할. 그런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