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25일 수요일
<시나리오>
2015년 10월 13일 화요일
Suffragette (2015)
https://youtu.be/-JYzgPPoQf0
Meryl Streep Interview on Suffragette
"Deeds, not words"
영화의 여운보다도 메릴 스트립의 인터뷰가 심장을 때렸다.
세상은 결국 다양한 문법과 언어의 교합물 이다.
그런데 그 언어는 때로는 수 많은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기도 하고, 태어난 순간부터 이유없는 폭력 아래로 내몰기도 한다.
태어났을 때부터 원래 그래왔다고 여겨지던 이 세상의 구조는 사실은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것이고 그리고 그것을 변화시킬 힘은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다.
이 영화는 그런 의미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가 누리고 있는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사실은 투쟁과 싸움의 결과였음을 말해주었고, 그것이 고작 100년도 되지 않은 역사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내가 집착했던 것이 행동이 아니라 언어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데올로기적인 신화를 수반하는 몇몇 단어들에 대한 일차원적인 거부감이
당연한 현상과 행동을 직면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메릴 스트립이 말하듯 - 무언가 틀린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
그것이 변화의 시작이라고 본다.
그러나 변화는 용기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하나의 행동의 시작은 또 다른 행동을 포기를 궁극적으로 수반한다. 포기해야하는 것들과 얻어야 하는 것들의 가치와 사회가 구성해 놓은 책임을 디디고 서서 안개 낀 길을 선택할 수 있을까.
지난 번 Martian을 보면서도 든 생각이었고, 이 영화에서의 에밀리의 죽음을 통해서도 느끼는 바이지만, 지금의 나에게 세월호 사건과 '절망적이고 희망이 없는' 일련의 사건들은 깊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단 한명의 생존에 세상이 움직이는 서사구조를 보면서 300여명의 학생들과 사람들을 바다 한 가운데에 두고 올 수 밖에 없었던 우리나라와, 그들에 대한 따뜻한 연민은 무관심과 짜증으로 바뀌었고, 생명을 저버리면서 까지 세상의 부조리함에 대항하려 했던 사람들의 '행동'들은 세상의 팍팍함과 이기주의 아래에서 묵살당했다. 지금의 우리나라 사회는 더 이상 행동이 세상을 바꾸지 못할 것이라는 패배주의에 휘감겨있고, 눈에 보이는 부조리는 보이지 않는 척으로 일관하는 것이 당장의 삶에 더 이로울 것이라는 판단에 이르게 한다. 극단이 아니라면 관심없음이 평범한 사람들의 가치가 되고, 평범한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용기 없는 사람들의 쉽지 않은 미덕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세상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여성에 대해 생각한다.
현실적인 어려움이라고 말하는 '말'은 문제에 대한 변화의지가 없다는 말과도 같다.
하지만 무엇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할 필요나 가치는 못 느끼고, 아니 필요나 가치는 실감하지만 내가 나서서할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
나는 지금 어디에 서있는가.
나는 여성 감독이 촬영한 이 영화를 정말로 오래간만에 보면서
미디어가 얼마나 남성중심적인 시선을 (멀비가 말한 그대로!) 관객들에게 강요했는지 깨달았다. 관객에 따라서 이 영화가 다른 영화와 얼마나 다른 시선을 (카메라의 움직임이나 프레임으로) 가지고 있는지 실감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이 영화는 정말로 여성의 영화였다 - 예를 들면 남성과 여성을 촬영하고 있는 level과 앵글의 차이, 일하는 여성이 느끼는 갈등과 감정선의 지점을 표면에 드러내고 그것이 영화를 이루고 있는 주요한 담론으로서 작용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역시나 당연한 것이다.
폭력은 정당하지 않다.
당연한 죽음은 없다.
그렇다면 명예로운 죽음은 있는가?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가치판단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미디어를 비롯하여 대중매체가 사람들의 가치를 보편화 시키고,
많은 사람들이 같은 것을 원하도록 만들면서
경쟁은 더욱 치열해진다. 소수가 누리고 있는 것들은 재분배되지 않는다.
* 글을 어떻게 쓰는가. 말을 어떻게 해야하는가.
나는 최근 몇 가지 중요한 인상과 키워드를 적당하게 버무리는 것으로 '말'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것의 한계를 매일 매일 어설픈 언어 속에서 실감하면서,
이제는 연결되지 않는 모호한 지점을 파고들어서 그것을 아주 명확하고 엄밀하고 깨끗하게 만들어 '말이 되는 말'을 하는 것을 언어 사용의 최대의 목표로 하고 있다.
다른 말로 한다면 나는 이제 알맹이가 있는 언어를 사용할 것이라는 말이 된다.
올해 초 나는 비전과 콘텐츠를 찾았고
여름의 나는 문법을 찾았고
지금의 나는 말을 찾고 싶다.
간극을 채우는 것은 궁극적으로 학문이 된다.
안개꽃으로 공간을 채우지 않겠다.
그것이 내가 삶을 대하는 기존의 태도였다면
나는 차라리 그것을 더 명확한 것들의 나열을 통해 비어야 할 공간을 비워두겠다.
** Vote for Women ;
나는 현실의 문제를 눈감고 있는가
반문하라
2015년 10월 11일 일요일
Right Now Wrong Then
Right Now, Wrong Then (2015, Hong Sang-Soo)
Cine Lumiere Screening (11/10/2015)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한번에 이 영화의 제목을 맞게 말할 수 있을까.
홍상수 감독의 그 신작 보았어요? 하면서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혹은 지금은 틀리고 그때는 맞다? 하며 버벅거리는 '시네필'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그 감독은 이상한 실소를 뿜었을 것 같다. 참 이상한 사람이다. 그의 카메라에 담긴 것들은 혹은 그가 카메라에 담은 것들은 대부분 위선적이다. 감정을 살려내려는 줌인이 없어도, 캐릭터에 대한 묘사가 없어도, 늘 반복적인 '홍상수'의 플롯 안에서 그는 계속 새로운 것들은 위선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한다.
영화는 크게 두 가지 챕터로 나뉘어져 있다.
그 첫번째와 두번째는 미묘한 지점에서 다르지만 전혀 다른 뉘앙스를 주는데,
그것이 엄밀하게 무엇인지는 사실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내가 읽기에는 첫번째와 두번째가 (물론 완전히 다른 촬영이었겠지만) 같은 평행적 상황에 대한 다른 표현이라고 읽었고 - 그러니까 다른 이야기는 아니라고 판단했고,
대사의 길이나 속도의 차이역시 보는 사람의 심리에 따라서 약간의 오차가 있을 수 있다는 판단하에 나는 그 둘의 '거의 비슷함으로 같다' 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분명하게 다른 것들은, 첫번째 파트는 매우 홍상수다웠다는 것이고 두 번째 파트는 또 다른 홍상수 다웠다는 점이다. 말로 정리하기 매우힘들지만, 1부에서의 남자 캐릭터가 더 익숙했다면 왜일까.
힘들게 상징과 색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고,
외국 관객들과 한국인 관객들이 다른 포인트에서 웃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아마도 홍상수의 영화가 좋은 이유는 역시나 그것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웃음 포인트와 분명 어른들의 인생의 어떠한 낮과 밤을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계속 그의 영화는 기대되고 기대되고
2015년 5월 31일 일요일
Rainbow
무지개 동화
무지개를 보고 동화를 쓰지 않는 것은 무지개를 내려 놓은 하늘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둥근 아치 모양의 끝은 보이지 않았지만, 가장 높은 꼭대기에서 부터 이야기거리를 잔뜩 들고 줄지어 내려오는 '작고도 큰 것들'이 있었다.
이 '작고도 큰 것들'은 말하자면 요정같은 존재라서, 내가 무지개를 볼 수 있는 기숙사 7층에서는 아치 위를 종종걸음으로 걷는 개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동차보다도 큰 제법 묵직한 모양새를 한다.
이 요정같은 것들이 들고오는 이야기거리란 무지개 색처럼 달콤하고 반짝이지는 않지만, 설레임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옮기는 얼굴엔 불안감도 가득하니 내가 얼른 무지개가 사라지기 전에 이야기를 하나 빼내와서 대신 적어내려 가기라도 하는 일이 옳은 일이라 생각했다.
무지개와 무지개 요정과 하늘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
#1
소녀가 태어났을 때 이미 소녀는 혼자였다.
소녀를 돌보아 주는 보모와 수행기사와, 소녀가 가장 사랑하는 폴이 있었기에 소녀는 외로움을 알지 못했다. 싸우거나 귀찮게 굴거나 잔소리하는 부모님이 없으니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고 소녀는 생각했다.
소녀는 자신의 시간을 스스로 사용하는 법을 알았다. 아침에 일어나 가볍게 스트레칭을 20분, 또 씻는데에는 30분 정도, 식당까지 내려가는 데 7분, 식사하는 데 35분, 일어나서 방으로 돌아오는 건 9분정도로 창문이 난 길을 따라 걸어온다. 보모가 추천해주는 옷으로 갈아입는데 12분 그리고 예쁜 구두를 신고 폴과 함께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걸어 대문을 열 때까지 또 20분. 그렇게 시간을 맞추고 나면 소녀는 스스로가 자랑스러워졌다. 쓸데 없이 보내는 시간이 단 한 순간도 없다니! 아마 나는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야! 소녀는 늘 그렇게 생각했다.
대문을 나선 소녀는 갈 곳이 없었다. 소녀는 태어났을 때 부터 늘 소녀였다. 그래서 어디에 가야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소녀는 무료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폴이 기뻐할지 궁리하다가, 점심 메뉴를 보모와 함께 정하고 오늘의 요리를 곰곰히 생각하다.
배우고, 이제는 내일의 계획을 세우면 된다. 소녀는 소녀의 삶이 완벽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 누구도 방해하지 않고, 자유롭고, 외롭지않고 사랑도 있다면 불필요한 것은 필요가 없다.
하지만 소녀는 그 생각을 너무 자주 했다.
자기 자신이 행복하다고, 그 삶이 완벽하다고, 그 누구보다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비가 오는 날에도 소녀는 대문 앞에 앉아 폴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오늘 소녀에겐 두명의 보모와 세명의 수행기사가 있다. 빵을 쥐어주고 다른 대문으로 내모는 소녀의 완벽한 삶이 반복된다.
[2013년 언젠가의 글]
2015년 5월 30일 토요일
논어 - 인문학 특강
물음이란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시간
論語(논어) - 孔子의 어록과 제자들의 문답을 담은 유교 경전
: 논어를 현대의 맥락에서 그리고 일상 속에서 적용 될 지혜로 이해할 것!
子曰:「學而時習之,不亦說乎?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人不知而不慍,不亦君子乎?」
2015년 5월 19일 화요일
2015년의 사회를 보고 쓰는 어떤 하나의 의견
A Perspective towards the Society of the Year 2015
[칼럼]
내가 현대 사회에 가지고 있는 의문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때때로 많은 경우에서 대다수가 이끌어가고 있는 현상이며 이른바 '대세'이다.
이에 '따라서' 편승해야 한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지만, 마냥 그 현상들을 부정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예를 들어, 평소 '말세' 나 '요즘 애들이~' 라는 말들을 내가 다른 세대의 사람도 아닌데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사회부적응의 면모를 보이는 것 아닌가.
어쩌면 지금 나에게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가치들이 이후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고, 그럼에도 절대 불변하는 것이 있으리라고 믿고 있기는 하지만, 이 믿음 역시 현재를 부정하여도 좋다는 핑계거리로는 충분하지 않다.
(예를 들어 애초에 이러한 - 지식인 코스프레 - 말투 역시 시대착오적이지는 않은가 우려하게 된다.)
사회에 적응하고자 하는 필사적인 노력과 사회적으로 교육받고 형성되고 스스로 끊임없이 쌓아온 것들이 심심치 않게 부딪히는 것은 결국 지금의 내가 규정되기 어려운 애매모호한 상태로 지속되도록 만든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불만은 없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대세'의 불편함의 몇 가지이다. (이는 차후 수정/추가 될 수 있다.)
1) 연애 강박 미디어 - 특히 '마녀사냥' 등은 상당히 불편하다. 뒷담화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인상과 여전히 사회 전체에서는 통용되고 있지 못하는 가치들을 표면에서 논쟁함으로서 세대간의 격차 혹은 괴리를 가중하고 있지는 않은가. <-> 전혀 반대로, 지금의 젊은 세대에서 현존하고 있는 그러나 논의되지 못하였던 '현상'을 양지로 끌어오는 시도로 보여질 수도 있다. 따라서 지금으로서는 몇몇 관객들 (나를 비롯한) 에게 충분히 소통되지 못하지만, 미디어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과 관심 - 시청률과 언론보도로 이어지는 - 은 이후의 트렌드를 이끌어가는 선구자적인 역할을 한다.
+ 그런데 결혼장려도 아니고 연애를 장려하는 미디어가 사회적으로 어떠한 기여를 하고 있는지 잘 이해하지 못한다. (이 것은 정말로 개인적인 견해로 -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 혹은 관계는 본능적이고 당연한 부분이기에 이를 부정하고 싶지도 않고 그것이 이 글을 작성하는 목표도 아니다. 또한 관객에게 가장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 있고 지속적으로 관객을 동원할 수 있는 안정적인 콘텐츠라는 것 -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지 보려는 것이다.) 지금 떠오르는 바로는 두 가지정도가 있는 것 같은데. 하나는 미국의 대중매체에서 - 예를 들면 디즈니 - 빈번하게 사용 된 '결혼의 신격화(idealised or mythical)'로, 결혼의 장려는 출산과 인구증대-> 더욱 효율적이고 강력한 사회 구축에 기여할 것이다. 따라서 연애의 장려는 결혼의 장려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두번째로, '썸'열풍은? (이는 기본적으로 결혼을 전제로 하거나 목표로한 인간관계가 아니라 연애의 전초전 정도로 보인다.)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물론 연애 자체에도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부여되어 있다. 이 역시 크게 두 가지로, '이성애자 양성' , '사회적 젠더 구성'이다. 둘다 젠더 이데올로기에 대한 것으로, 대한민국의 매체에서는 아주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몇몇의 동성애 트렌스젠더의 방송인들) 대부분이 이성애를 기본 전제로 한다. 이성애에 대한 장려는 다른 관계를 금기시한다. '사회적 젠더 구성' 이라는 측면에서는, 미디어에서는 빈번하게 여성과 남성의 역할을 구분하고 이를 재현하는데 그것이 연애 / 러브라인에서는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각종 리얼리티 예능과 토크쇼 등에서 여성 게스트와 남성 게스트를 수식하는 말들을 분석한다면 이해될 것이다. 가장 단순하게는 여성과 남성이 좋은 외모를 지닐 수록 사소한 행동에도 많은 호응을 얻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장난과 놀림거리의 대상으로서 주목한다. (그러나 미디어가 부여한 남성과 여성의 이미지라고 하는 것이 지금 시대에는 카테고리화하기 힘들 정도로 분화되어 단순화 시키기에는 한계가 있다. 여성만 하더라도 청순/섹시/국민여동생 남성의 경우 초식/짐승/지적인 등의 수식어가 번갈아가며 트렌드를 교체시키는데 더더욱 많은 예외가 등장한다.) 혹은 몇몇의 연애를 주제로한 프로그램에서 이야기 하듯 '어떻게 하여야 남성/여성이 좋아한다.' '어떻게 하여야 남성/여성에게 매력을 어필할 수 있다.' 하는 등의 가이드라인이 일종의 '연애 이데올로기'를 구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여성이 좋아/싫어하는 남성의 패션 스타일 등은 획일화된 남성상에 기여한다. 특히나 트렌드에 민감한 현대 대한민국 사회의 젊은이들의 경우 이러한 몇몇 목록에 더욱 열광적으로 반응한다.
2) 언어 파괴 - 언어를 특히 글을 사용할 수단이 카톡/이메일 등으로 수렴되어, 이러한 매체의 특성에 적응된 언어의 사용이 가속화 된다. 특별히 글을 쓰는 사람이나 문과를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더욱 그러하다. 이에 대한 우려는, 앞으로도 간소화된 언어가 대세로 자리잡고 더더욱 가속화 될 것이라는 점이다. '언어'가 사람의 사고방식, 세계관, 문화 등을 상당부분 (아니 거의) 결정짓는다고 할 때 간소화된 언어는 더욱 풍부해 질 수 있는 사고(생각)을 제한한다. 예를 들어, '~어떠하다'고 생각되고 지속될 수 있는 이야기들의 가능성들이 '헐, 대박' 이라는 언어에 의하여 단절되어버리는 것이다. 간소화된 언어를 일상생활에서 지속적으로 사용하다 보면 실제로 어떠한 기분이나 생각을 표현하려고 할 때 어떠한 방식으로 해야할지 어려움을 느끼게 되고, 단순한 표현으로 간소화된 감정과 순간들은 이후에 기억되기 어렵거나 반감된다. <-> 따라서 언어/텍스트 외의 대체 수단이 훨씬 더 중요해진다. 예를 들면 사진과 동영상과 같은 시청각적인 언어로서 상황, 기분을 표현하고, 경계없는 '예술' 의 영역; 음악, 춤, 육체, 기술, 그림, 조형 등을 통하여 여전히 사고하거나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언어의 간소화가 사고의 제한으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다양하고 혁신적인 언어표현으로의 발달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려를 표한다. 여전히 삶에서 글자와 언어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상당하다. 특히나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소통하는 가장 주요한 수단이 말이다. 스스로 눈을 감고 생각하는 수단도 언어다. 사람은 언어 밖으로 단 한발짝도 나갈 수 없다는 말이 (심지어는 무의식의 세계에서도) 나는 지금의 사회에서도 여전히 통용된다고 본다. 따라서 대체의 수단이 충분하게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급격한 언어의 파괴는 문제가 된다.
+ 또한 연애의 장려는 다른 사회적 문제에 대한 가장 쉽고 환상적인 개인적 차원의 해결로, 이를 장려함으로서 개개인의 현실적인 문제들, 취업되지 않고 불평등한 사회라고 하는 사실- 을 어느정도 무시하도록 한다. 의식적으로 이를 연애와 로맨스의 획득을 통해 해소하는 것처럼 보이도록한다.(이것이 뮤지컬과 로맨스 내러티브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특징)
3) 포기의 합리화
자기계발이 시대는 지나갔다. 그러니까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아프면 병원가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힘들고 팍팍한 세상에 아픈 것은 당연하고 하며 이를 아름다운 말로 치유해주는 일들이 그다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전세계의 경제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으며, 어디를 가든 취업이 어렵다한다. 일하지 않으면 돈을 벌 수 없고, 돈을 벌지 못하면 살아가기 힘들다. 선택과 집중의 원칙에 따라 포기해야하는 것들이 많이 생긴다.
사실은 사회 전면의 '포기' 트렌드를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하고 싶고, 이해해야한다고 그래서 결국엔 사회전체와 국가차원의 문제에서 그 원인을 찾고 해결해야한다고 말하고는 싶지만, 나는 때때로 아픔을 핑계로 쉬운 포기를 택하는 나약함 역시 사회에 만연하다고 말한다. (이 문장을 쓰는 나 자신이 극도로 보수적이라는 생각에 고민하게 된다. 개개인의 아픔을 완전히 이해하거나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사실에 또 우려하게 된다.) 그래서 김승옥 소설의 하나의 구절을 불러온다. "날이 갈 수록 내 도피의 어리석음이 드러났다. 미워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반항하는 법을 배웠더라면 나의 괴로움은 진작 서울에서 무마될 수 있을 거이다."(환상수첩, 59) 요컨데, 사회의 만연한 도피와 포기의 합리화의 원인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문제 해결능력의 부재에 있다고 순화시켜 말한다.
내가 발견하는 가장 표면적인 현상은 성형 열풍이다. 대한민국은 성형공화국이다. 성형의술 (혹은 기술?)은 극도로 정교하게 발전되어 이제는 티나지 않게 쉽고 간편하게 저렴하게 빨리 자신의 외모를 변화시킬 수 있다. (더 이상 여성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그런데 젊은이들이 자신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가장 적극적이고 진취적이고 희생 (고통과 돈)을 담보로하는 행동이 성형이라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성형을 통하여 가장 빠르게 자신의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다고 하는 믿음과 또 실제로 존재하는 즉각적인 효과들이 더욱 성형을 부추긴다. 예를 들어 작은 시술로 예뻐진 친구가 그 이전에 비해 이성에게 많은 인기를 얻고 다른 분야에서도 긍정적인 결과를 낸다면 주변 사람들은 이를 좋은 '문제해결방안' 이라고 믿는다. - 말하자면, 예쁨/잘생김이 만병통치약! - 성형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도 많이 변화했으며, 자신의 컴플렉스를 극복하고 자신감을 얻는 도구 / 건강상의 수술이 심미적으로도 가능해짐 / 성형산업의 확대로 세계의 중심지로서 기대하는 경제효과 등의 순기능도 물론 무시할 수 없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성형은 자신의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노력과 도구 중 가장 쉽고 나약한 선택이다. 외모지상주의에 스트레스를 받아 외모지상주의를 부추기는 선택을 하고, 외모지상주의의 너머에 있는 자본주의의 굳건함 (돈만 있으면 다 된다고하는) 에 기여하고 결국에는 기득권의 바람대로 사회구조가 형성되는 (마음대로 비약하자면) 이러한 순환구조를 영속시키는 것 아닌가. 성형 열풍에 대해서는 더욱 다차원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또한 이 역시 미디어, 스타시스템, 광고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에 '젊은이의 나약함'이라는 표현으로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음이 사실이다.
쓰다보니 극도로 보수적인 글이 되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말았다. 이런 식의 논리는 사회를 흔드는 데에는 그다지 기여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현재 뿌리내린 사회 전반의 보수화에 나 역시 편승한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마저 든다. 이럴 때 '정치적 보수화' 와 '사고의 진보화'가 표면적으로 충돌하고 있는 젊은이들과 '정치적 진보화'와 '사고의 보수화'가 충돌하고 있는 나, 무언가가 어떤 지점에서 부딪히고 있는지가 명확하지는 않다. 아니 애초에 진보니 보수니 하는 양극의 프레임으로는 설명되어지지 않는다. 더 좋은 글쟁이라면 조금 더 넓게 사회를 볼 수 있을까. 내면의 만연한 불안감이 글에 묻어난다. 더 많은 이들이 나의 글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좋겠다. 평소와 같은 시니컬함으로 무시한다면 좋겠다.
Published 19 MAY 2015
2015년 4월 24일 금요일
문학은 나를 덜 외롭게 한다
2015년 4월 13일 월요일
[영화] Blade Runner 블레이드 러너 (1982)
2015년 4월 10일 금요일
[일상] 데일리 칼럼 - 나르시시즘
2015년 4월 9일 목요일
[영화] While We're Young 2014
While We're Young 2014
Noah Baumbach / Ben Stiller / Naomi Watts / Adam Driver / Amanda Seyfried
Noah Baumbach 감독을 알게 된 것은 불과 이주 정도 전, 프랑스 여행을 앞두고, 프랑스 누벨바그 수업의 현대적 리퍼런싱 격인 (혹은 그렇게 설명 받았던 ) Frances Ha (2012)를 보게 된 이후로다. 그 영화는, 정말로 유쾌하고 어쩌면 '데이트 못하는 여자'의 심리를 프랑스틱한 방식으로 - 혹은 프랑스 영화 스러운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는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지을 법한 그 애매모호한 웃음을 떠나지 못하게하는 그런 류의 영화였다. 나는 주인공 Frances에 상당히 영감을 받은 나머지, 여자가 그려내는 데이트 못하는 여자 삼부작 정도를 만들면 어떨까. 뭐 그런 생각에 이르기까지 한 것이다.
아무튼 나는 저 감독의 배경이나 저 영화의 다른 맥락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지만,
영화는 분명히 시네필의 영화였다. 영화 이론과 영화사에 대한 이해 그리고 영화과에서 자주 떠오르는 주요한 고민과 토픽들을 있는 그대로 대사로서 드러내거나 했다.
그래서 While We're Young 이 영화가 그랬다.
내가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는, 최근 행복하다 못해 그 행복함에 완전히 녹아나지 못하는 황금기의 젊은이가 가지는 사치스러운 고민들을 약간은 긁어줄까 했던 것이고, 영화는 제목처럼 젊을 동안에를 그렸다기 보다도 'Success-Oriented' 하지만 'Success'하지 못한 영화계 중년 부부의 이야기였다. 여기서 끌어온 몇가지 리퍼런싱은 이번에는 다큐멘터리 영화 만들기에 있었는데, 에롤모리스나, 에이젠스타인이나, 나오미와츠의 아버지로 나오는 유명한 다큐멘터리 감독의 '진정성'과 '진실/Truth'에 대한 강연이나, 벤 스틸러의 '북극의 나누크'에 대한 언급이나, 여러모로 지난 학기의 다큐멘터리 수업의 주 된 주제 였던 'One has to distort a thing to catch a true sprit'이라는 (이것은 나의 에세이 주제였다.)와 맞물리고 있었다. 하지만, 말하자면 그것은 영화의 곁다리거나 영화를 좋아하거나 공부하는 이들에게 재미를 주기위한 소스같은 정도로 곁들어져있고 핵심은 역시나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중년 부부가 한창 때를 살고 있는 - 한 창 때의 늘 무언가를 만들고 움직이고 도전하고 있는 젊은 부부를 만나 느끼는 감정과 변화에 대한 이야기다. 자신의 동년배들은 모두 아이를 가지고, 아이를 가지는 일이 자신의 모든 세상을 변화한다고 말하고 실제로도 그들의 삶은 아이를 중심으로 변하는 듯했다. 나의 가장 좋은 친구는 더 이상 그 친구가 아니고 (이러한 주제에 대한 - 당연하지만 어쩔 수 없고 막을 수 없는 친구사이의 변화 - 에 대한 고민은 Frances Ha에서도 잘 나타났는데, 사랑보다도 더 미묘한 우정의 변화를 그린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자신과 자신 주변과의 관계에 묘한 마찰/어색함/어울리지 못함 이라는 상황에서 구출해줄만한 신선함을 25세의 젊은 부부에게서 찾은 것이다. 25세의 젊은이들에게서 그들은 자신의 젊은 시절을 돌이켜 보게 되다가도, 변해버린 자신들의 사랑이나 관계, 진전하지 못하는 일에 지치기도하고, 젊은이들과 어울리면서 익히고 배우게된 새로운 태도들에게서 좋은 영감을 받게된다. 이러한 변화를 그려내는 데 있어 2014 - 2010s의 유물인 스마트폰 '아이폰'이라고 하는 도구는 아주 효과적으로 이용되는데, 정말로 10년 후에 의도적이고 동시에 자연적인 기술품의 반영이 이 후 어떻게 받아드려질지 그들을 촬영하는 동시에 이미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어른들은 밥먹으러 모여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궁금한 것이 생각나면 검색해버리고, 중요한 회의를 하는 중에 울리는 메시지음은 예전엔 rude했지만 이제는 accepted 된다. 그런데 이 젊은이들은 우리들은 페이스북을 하지 않고, 타자기를 쓰고, 아날로그 음악을 들으며, 궁금한 것은 찾지 말고 그냥 모르는 채로 두자. 라고 말하는 것이다. - 참 젊은이들은 왜 그러는지 모르지만, 나를 포함하여 아날로그는 이 시대의 것이 아니기에 더 cool해 보인다는 착각에 빠지거나, 아니면 실제로도 현대의 물건들은 늘 존재하고 있는 것이며 나를 피곤하게 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여 약간 도피하고 싶다는 생각에 빠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모티콘을 치는 방법, 약어를 쓰는 방법을 알아내어 즐거워하는 부모님이나, 페이스북을 통하여 소통하고 SNS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수업을 기획하는 교수님들은 참 좋아진 세상의 혁신에 더 들떠있어보이지 않나. (그 와중에 어른보다 더 어른같은 표정을 가진 어린아이가 아이폰을 사용하여 전화를 거는 장면은 '그래도 이건 좀 아닌데...'하는 생각을 주기에 충분했다.)
벤스틸러가 '내가 너의 거짓을 다 폭로해주지' 하며 신나하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다. '젊은 다큐멘터리 필름메이커'로서 가장 '진정성넘치는 방식으로 진실을 추구해야할' 바로 너가! 사실은 다 사기를 치고 있었다니, 이런 귀신이 곡할 노릇이 있나, 거짓을 알아낸 벤 스틸러가 흥분해서 파티장에 돌아와 다큐멘터리의 거장 앞에서 이러한 얘기를 했을 때 아무도 그것을 문제삼지 않은 것은, because that is the way it is 였기 때문이다. 벤 스틸러 캐릭터가 믿고있었던 무언가가 -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믿었던 '말하자면 환상 같은 기준이' 그다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장면처럼도 보였다. 하지만 나누크도 그렇지 않던가. 가짜의 이글루와 세트장에서 액터들과 함께 촬영된 다큐멘터리라고해서 다큐가 아니고 진실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분명의 그러한 비밀이 폭로되었을 때 효과는 많이 반감되지만, 하지만 사실은 많은 사람들은 눈에 더 많이 보이는 것 더 많이 이야기 되는 것을 믿고, 비밀이 그다지 흥미롭지 않은 경우에는 알아도 모른척 하거나 그냥 눈감고 넘어가준다. 아니 뉴스에는 사람들은 충격적인 비밀이 폭로되기를 기다리며 그것을 미친듯이 물어뜯고 사냥할 것 같지만,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약간의 비밀 혹은 조작이 더 중요한 것을 말하기 위한 유용한 장치라면 어느정도는 허용된다. 하지만 이 것을 허용한다고 말하는 순간, 약간의 비밀과 약간의 조작은 기준 없이 불어나, 더 중요한 것을 압도해 버릴지 모른다고 하는 위험을 담보하게 된다.
1년후 벤 스틸러는 그는 나쁘지 않고 젊었다고 말하는 것에, 반사적으로 나는, 나는 지금 이 순간 젊지만 저렇게 살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이 다시 한번 나를 긁었다.
2015년 4월 8일 수요일
[책/소설] 환상수첩
[영화] 신데렐라 Cinderella (2015)
영화관에 가서 볼 생각은 없었는데, 마침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와 수다를 떨다보니 우리의 어깨에 얹어진 스트레스를 풀어줄만한 가벼운 영화가 보고 싶었고, 아마도 그 친구는 많은 이들이 보는 영화를 보고 싶었던 것 같았다. Tottenham Court Road의 오데온 영화관을 가는 일도 오랜만의 일이었다. 예전에 다니던 학교 근처에 그 때 함께하던 친구와 함께 있다는 것 만으로도 나는 이미 약간은 향수에 젖어있었다.
신데렐라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일단은 이 영화에 대한 몇 가지 이야기.
1) 나는 이 영화가 Frozen Fever의 얹어팔기라는 것을 몰랐다. Frozen Fever를 기대하지 않고 갔기 때문에 더 즐거웠고, 더 재미있었다. 엘사가 한번 재채기를 할때마다 화면이 귀여움과 사랑스러움으로 가득했다. 뒷자석의 꼬마가 나 저거 사달라고 엄마에게 떼쓰는 것 마저도 나에게 동심을 일 깨워 줄만한 그런 것이었다.
2) 신데렐라는 ... 주인공이 더 예뻤으면 좋겠네 어쩌네. 내가 보기엔 충분히 예뻤다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 영화는 그저 그랬다. 말하자면 별 두개 반정도를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평을 하기보다도 이 영화가 불러 일으킨 몇 가지 질문/키워드 들이 있다.
- Spectacle : 화려한 장식과 옷, 와이드 스크린과 로우앵글에서 세로로 빛나고 있는 여성 - 변신한 신데렐라' - 는 바람과 사라지다의 비비안리를 떠올리게 했다. 그 만큼 화려하고 'spectacle'한 여성을 어떻게 하면 그려 낼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을 이 영화는 정말로 잘 알고 있다. 궁전의 무도회 장면, 궁전 밖의 정원 장면을 찍어내는 방식은 그야말로 클래식한 스펙타클이었다. 그런데 내가 이 영화가 타겟으로 하고 있는 관객이 아니어서 일까, 왜 나는 더 이상 이러한 방식이 정말로 웅장하고 압도당할만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가. 지난학기 내내 크라카우어의 장식, 의지의 승리의 스펙타클과 헐리우드에서의 재사용 등에 대한 '(영화 읽기가 아닌) 영화 보기'의 경험에 도움이 되지 않는 어설픈 이론들이 나를 방해하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만, 아무튼 나는 심지어는 가장 아름다워야 할 신데렐라의 파란 드레스도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껴지더라. 그나마 계모와 쌍둥이 같은 두 언니들을 꾸며내는 소품과 의상들은 돈을 많이쓴 뮤직비디오 처럼 꽉차보였는데, 신데렐라는 시종일관 로맨틱하고 아름다운 무드를 연출해줄 조명만 금발머리에 반짝이고, 화려한 장면들은 스펙타클로 채워졌지만 스펙타클은 없었다. :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말로 잘 아는데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은 느낌이었다. 아마 이러한 기분에는 의문스러운 몇 가지 선택들 때문 이었을 거다.
- 의문스러운 선택들 Why? 왜 그랬을까. 아마도 잘하면 좋은 각색 어설프면 어설픔으로 끝날만한 것이지만,
why? 어설픈 코미디(변신장면, 코미디 요정) - 정말로 실망스러웠다. 분명히 웃을 수 있을만한 가장 재미있는 장면이었으나, 나는 신데렐라의 변신이 우스꽝스러운 거위와 도마뱀이 꾸역꾸역 변신하고, 요정과 신데렐라가 갑자기 커져버린 호박에 눌려 찌그러지는 장면이 아니라 가장 화려하고 가장 아름답고 나의 환상의 끝판왕을 충족시켜 줄만한 'the fantasy'! 이기를 기대했던 것 같다. 인자한 할머니가 나와서 신데렐라를 완판녀로 만들어 줄만큼 예쁜 아이템으로 아기자기하게 드레스업해주길 원했던것 같다.
what? 그럼 여기서 또 질문하나. 나는 이 영화에서 무엇을 기대했는가? 둘 중 하나다. 끝내주게 좋은 각색 - 약간의 사회적 메시지, 블랙코미디스러움, 세련미 넘치는 화면 OR 동심판타지 충족의 끝판왕, 클래식의 완성, 이것이 디즈니 이데올로기다 다들 부럽지?? 신데렐라 되고싶지?라고 말하는 디즈니 of 디즈니...), 그런데 결국엔 애매~하다. 신데렐라라도 하려먼 적당히 저 정도 이쁘던지, Be Kind Have Courage라고 스스로의 의지와 성격을 다스리지만, 결론은 예쁘고 좋은 부모님에게서 태어나서 왕자님 눈에 나는게 성공이네, 그런데 신데렐라 보면서 너무 바라는 것도 많다. 그냥 보면 될텐데...
why? 그래도 여전히 문제적인 동정심(?)을 일으킬만한 계모 캐릭터 : 행복을 바라는 두딸 있는 재혼녀. 그녀의 연기나 의상이나 심지어는 그녀를 촬영한 방식도 가장 기억에 남는다. 원작의 캐릭터보다는 입체적이나, 정말 좋은 캐릭터가 될 만큼은 입체적이지 못하다. 그래도 이 여자마저 없었다면 참 심심했을 것 같다는 생각.
what..? 무도회 장면 / 왕자와 신데렐라의 거슬리는 Sensual Touch 왜 저러는건가. 12세관람가에서 왕자가 신데렐라의 허리를 잡는 장면을 클로즈업한다던가 춤추는 동안 공주의 애매한 표정을 보여준다던가. 감독이 개인적으로 신데렐라의 성인판 - 막장으로 인생 한방에 핀 신데렐라 (불여시)와 욕망에 불타는 계모 (재혼녀) 라도 찍고 싶다면 그건 자유지만, 이상한 뉘앙스를 은근 풍기는 것 마저 난 '윽 싫어' 였다. 아니면 이것도 내가 obssessed by Hollywood Male Gaze..?이런건가...
결론은 참 애매모호하고, 케이블에서 자주 만날만한 영화였다.
2015년 4월 5일 일요일
[런던생활] Easter Holiday 2015 영국의 부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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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10일 화요일
[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 Hiroshima mon amour
나의 다섯번째 누벨바그 영화이며, 아마도 두번째의 일본에 관한 프랑스 영화. (첫번째는 Chris Marker의 San Soleil (Sunless) 였다.)
그리고 기억과 시간, 트라우마와 역사에 대한 영화.
이번 모듈에서 가장 어려운 영화라고 했지만, 지난번 크리스 마커 영화의 충격(혹은 너무 강렬한 인상) 덕분에 이 영화는 비교적 이해를 시도해 볼 수 있는 영화라는 인상을 준다.
역시나 그 둘은 LEFT BANK로 인연이 깊다. 사실은 이 두 영화를 비교하는 일도 가능 할 것이다. 공유하는 것이 많은 만큼 차이점도 분명하다. 하지만 내 생애 하고 싶은 일은 아니다. 아니면 내가 영화를 언젠가 죽기 살기로 분석해보고 싶을 즈음에 도전해 볼만한 일이다.
아무튼간에,